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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득(2018). [평양 기독교 역사 01]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1). 기독교사상, 720, 207219.
- 평양 기독교 역사는 1866년(병인년, 고종 3년) 9월의 평양 양란(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66) 목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207)
- 신학교 교회사 교수 중심의 ‘선교사-순국설’과 일반대 한국사 교수 중심의 ‘제국주의자-처형설’이 대립... (207)
자료와 사관의 문제
- 1866~75년에 조선 정부나 외국 선교회 등이 생산한 사료들...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함... 정리하고 편찬한 시기가 1920년대 중후반... 편찬자들이 소속된 집단의 입장을 탈문맥화하는과정을 거쳐야 진실이 드러날 것... (208)
- 『고종실록』(이왕직, 1935)은 1927년부터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쇼고(小田省吾)를 책임자로 한 편찬위원회가 작업... 『승정원일기』, 『일성록』, 『각사등록』 등에 실린 1차 자료... 정부군의 반격과 양이의 처형을 정당화하는 봉건 조선 정부의 입장... 총독부의 『조선사』(1938)는 조선 정부의 입장을 계승하면서 반서양 동아주의의 시각을 견지... 태평양전쟁기의 일본 군국주의 해석과 북한 역사서의 반미주의 사서는 이 노선을 따른다... (208)
- 오문환(1903~62)의 『조선기독교회사의 일분수령인 평양양란』(평양 광명서관, 1926)과 『도마스 목사적』(도마스목사순교기념회, 1928)은 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항하는 평양 기독교인들의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일부... 수집한 구두 증언은 사건 발생 60년이 지난 시점이 부정확한 기억들이 혼재... 제도 교회의 영웅전으로 학문적 비판이 결여... (208)
- 순교사관을 가졌던 오문환이 1938년부터 평양기독교친목회를 조직하여 신사참배와 친일에 앞장섰고, 해방 이후 서울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을 덮기 위해 ‘순교’에 ‘반공’ 사관을 덧입혀 백령도 ‘선교’를 내세웠던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 (209)
- 그 사건을 어떤 공동체가 어떤 삶의 자리에서 왜 그렇게 해석했는지를 밝히는 해석사의 정리가 중요... 사실과 함께 진실을 찾는 역사가의 재현은, 사건 → 원 사료(기록자의 관점+상황1) → 해석된 역사(해석자의 관점+상황2)를 놓고, 두 관점과 두 상황에서 벗어난 제3의 관점을 찾기 위해 이중적 탈문맥화 작업을 해야 한다. (209)
역사적 토마스
-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난 토마스는 뉴칼리지를 졸업한 후, 1863년 6월 하노버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파송되었다. 그해 12월 상하이에 도착한 후 4개월 만에 아내가 사망하는 슬픔과 선배 선교사들과의 갈등으로, 1864년 12월 선교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 지푸의 세관에 취직하여 독립 선교사가 되었다. 그곳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 총무였던 윌리엄슨은 황해를 건너온 천주교인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난 후 1865년 9월 4일 토마스를 한국에 권서로 파송했다. 토마스는 김자평의 안내로 황해도 옹진군 창린도에 도착하여 몇 달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1866년 1월 베이징에 돌아와 조선 동지사를 만나 한국 사정을 탐지했으며, 런던선교회로부터 재임명을 받았다. (209-210)
- 토마스는 1866년 7월 NBSS 권서로 재임명 받고, 평양행 미국 상선 제너럴셔면호에 통역인으로 동행... 조선 정부는 유화 정책에 따라 물과 식량은 제공했으나 통상과 내륙 항해는 금지... 평양감사 박규수는 해방론 입장에서 여러차례 경고... 상선은 무역을 요구하며 평양행을 감행... 토마스는 강변의 여러 마을에서 한문 성경을 반포... (210)
- 중군(정3품, 감영의 군사령관) 이현익이 승선하여 협상하던 중 인질로 잡혔으나 장교 박춘권이 구출... 협상을 주도하던 박규수는 상선의 도발적 발포로 민간인이 죽자, 조정에 보고하고 공격을 명령했다... 9월 2일(음력 7월 24일) 화공법으로 셔먼호를 전소시켰다... 토마스 등 선원 24명은 군민이 섬멸했다. (210)
- 『조선사』(총독부 조선사편수실, 1938)... “제너렬셔먼호가 양각도까지 올라와 총을 쏘며 상선의 양식을 약탈하고 주민 7명을 살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에 박규수가 출두하여 종일 감독하는 가운데 중군 백낙연과 서윤 신태정이 지휘하여 화공 포격을 했다. 24일 군민이 함께 화공을 하고 포수와 사수를 동원하여 공격했다. 정오에 셔먼호에서 포와 총을 쏘아 주민 1명이 사망했다. 이를 본 모든 백성과 수비 군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는데, 여러 척의 배에 가득 실은 풀에 불을 붙여 떠내려 보내어 셔먼호가 불에 타게 되었다. 이에 토마스와 조능봉이 뱃전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살려달라 구하니 바로 잡아서 결박했다. 군민들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히 타살하니, 나머지 선원은 화살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타서 죽었다.” 토마스는 결박된 채 군인과 주민에 의해 일요일에 타살되었다. (210-211)
첫 50년의 해석사, 1866~1915년
1) 부정적 평가
- 1866년 11월 7일 「뉴욕 타임즈」는 제너렬 셔먼호가 좌초되어 40명의 선원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12월부터 영미 언론은 내륙까지 들어간 상선의 책임을 거론했다. 미국 정부는 1871년 신미양요까지 무력해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2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주역은 슈펠트 제독... (211-212)
- 아펜젤러는 1887년 슈펠트로부터 받은 조약 관련 원고를 10년이던 1892년 Korean Repository에 소개하면서 제너럴셔먼호의 평양행을 비판하고, 조약을 통해 은자의 나라 조선을 개방하고 서구 문명을 소개한 슈펠트를 콜럼버스에 비유... 아펜젤러는 미국의 정책 변화로 조약이 체결되고 선교사들도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 (212)
- 초기 선교사들은 19세기 중반의 군함(무력)이나 상선(무역)을 이용한 선교 방법론을 배척... 서구 제국주의 전성기(1880-1914)에 선교사들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하지 않았다... 1866년 런던선교회는 상처한 젊은 선교사가 무모한 여행으로 불필요한 죽음을 초래했다고 비판... (212)
- 1890년대 초 마페트가 평양 전도를 시작할 때, 주민들은 서양 오랑캐의 침략을 기억하고 서양 종교를 배척했다. 그는 토마스의 성경 반포를 평양의 첫 선교 활동으로 인정했지만 힘을 앞세운 불법적 방법을 비판했고, 양란이 없었더라면 복음의 문이 더 쉽게 열렸을 것으로 보았다. 청일전쟁 후 1895년 주민의 목격담을 Korean Repository에 처음 소개한 게일은 토마스를 순교자로 표현하지 않았다.... 민간 불교신앙과 기독교의 갈등 상황... (212-213)
- 헐버트의 History of Korea(1905)는 상선의 무모한 내륙 항해와 침략 행위를 비난... “이 문제의 양측을 편견 없이 공부한 학생이라면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배는 경고를 받았으나 모든 여건이 좋았더라고해도 좌초할 수밖에 없는 항해를 무모하게 감행했다. 한국인들은 이것이 단순한 실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자연히 적대적인 배로 간주했고 그렇게 처리했다.” (213)
2) 긍정적 평가
- 공식적인 첫 긍정 평가는... 1909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북장로회 선교 25주년 기념식... 마페트의 연설을 계기로 토마스 목사의 매장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소위원회가 임명... 마페트는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할 때 토마스기념교회 설립 후원을 부탁했다. (213)
- 1911년 10월 총독암살음모사건(105인 사건)이 일어나 교인들이 투옥되자, 평양을 중심으로 1916년 토마스 50주기를 바라보면서 그의 죽음을 재평가하기 시작... 토마스기념특별위원회... 마페트는 토마스를 기념하는 평양 제5장로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NBSS에 500파운드 지원을 요청... 공회가 재정 악화로 철수하면서 기념교회 설립은 좌절, 1915년 특별위원회도 해산... 50주년은 큰 기념행사없이 지나감... (213-214)
- 한국 선교지에서 은퇴하고 1911년 뉴욕 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편집 총무로 일하던 존스 목사가 1915년 보스턴대 신학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강의할 때...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병인박해를 연결해서 이해... 프랑스 선교사들과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순교로 정의... (214)
50주년부터 100주년 이전까지 (1), 1916~45년
- 토마스를 순교자로 본 글들은 반기독교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난 1925년부터 등장... 1926년 60주년을 계기로 자리를 잡았다... 1926년 7월말 안식교회 순안병원의 헤이스머 의사 사건은 반기독교-반미-반선교사 운동에 기름을 부어 지방에서도 선교사 규탄대회가 열렸다. 1927년 장대현교회에 노년파와 청년파 간의 분규가 발생해 길선주 목사가 사임했다... 이 상황에서 20대의 오문환은 보수적인 마페트-길선주의 노년층과 노회-총회 측에 서서 친선교사-친미 노선을 옹호했다. (214)
1) 1926년 토마스 순교 60주년 기념
-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서술한 첫 번째 책은 1925년 7월 평양의 강규찬, 김선두, 변인서가 공저한 『평양노회지경 각교회 사기』... 1925년 7월 5일 로마의 성베드로성당에서 거행된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에 영향을 받은 듯... (215)
- 숭의여학교 영어교사 오문환... 1926년 8월 『조선기독교회사의 일분수령인 평양양란』을 발간... 서문에서 채필근 목사는 1925년 7월 경성교역자연합회 수련회에서 토마스 목사 치명 60주년을 기념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을 밝혔다... 평양을 방문한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스피어가 오문환의 작업을 격려... (215)
- 경성교역자연합회 148인의 발기로 1926년 11월 14일에 3대 기념식(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대영성서공회 조선지부 설립 30주년, 밀러 총무 봉사 25주년)이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렸다. 서경조 목사의 연설... 성서공회 서기 최재학은 「기독신보」에 토마스 목사의 약력을 소개... 순교자로 정리... 서울에서는 성서공회기념사업과 토마스순교기념사업을 이어준 연결고리인 성경 반포를 강조... (216)
- 오문환... 「기독신보」에 소개... 이재풍 목사의 사촌 처남... 최후의 순간에 군인에게 신약성경을 주었으며, 그 붉은 표지의 신약전서가 토마스의 순교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주민이 아닌 군인을 처형자로 지목... 최후의 기도와 성경 전달 노력을 강조하기 시작... (216)
- 60주년 기념식과 토마스 목사 순교 전말을 보도한 「동아일보」는 최후까지 전도에 정성을 바친 부분은 인정했으나, 기자릉 도굴로 일확천금을 꿈꾼 제너럴셔면호의 상업적 동기와 선제공격을 비난... 「조선일보」는 침묵... 일부 잡지는 평양 양란을 일으킨 제너럴셔면호의 침략행위를 비판... (216-217)
2)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의 활동
- 1927년 5월 7일 숭실대 강당에서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회장 마페트, 서기 오문환)가 창립... 전기 발간, 기념교회 설립, 기념 전도사업 추진... 5월 8일 주일에 순교기념예배... 민휴 총무의 연설, “토마스 목사 기념의 세 가지 큰 이유”라는 제목의 오문환의 연설, 그리고 토마스로부터 성경을 받은 노인의 증언... 기념교회당 건립을 위해 조왕이레 1,009평의 부지를 매입... (217)
- 한국에 ‘순교’라는 단어와 담론이 1927년 5월에 조직된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로 인해 확산... (217)
- 1927년 9월... 선교사 해밀턴... 오문환이 수용한 이재풍 목사의 말을 근거로... 군인이 토마스를 죽였다고 서술... 그 군인의 여자 조카는 숭실대를 졸업(1926)g고 레이놀즈 선교사의 성경 번역 조사가 된 이영태의 모친... (217-218)
- 해밀턴의 글을 바탕으로 런던선교회는 소식지에 60년 전에 비판했던 토마스를 순교라로 소개하고 평양 지역 교회의 발전을 높이 평가... (218)
- 백낙준은 토마스를 순교자로 정의하지 않음...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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