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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득 (2019). [평양 기독교 역사 02] 1866년 평양 양란(洋亂)과 토마스의 순교, 그 해석사 (2). 기독교사상, 721, 187-200.
50주년부터 100주년 이전까지 (1), 1916~45년
- 사회주의자들은 평양 양란을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긴 전투로 규정하고, 단순 통상 교섭을 넘어 평양까지 와서 중군을 욕보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며 재산을 약탈하고 심지어 婦女子(부녀자)까지 凌辱(능욕)”했다고 비판했다. (187)
- 1928년 「별건곤」의 한 기사... 다시 말해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세간에 ‘최난헌(토마스의 우리나라식 이름) 사건’이라고 불리며 외국인과 상관이 없는 사건처럼 여겨지지만, 미국과의 전쟁인 신미양요로 연결되었으며, 기고자는 통상을 위한 내륙여행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선장이나 토마스는 교섭 실무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187-188)
- 총독부조선사편수회 위원... 이능화...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한국교회사인 『조선기독교급외교사』(1928)에서 조선 패망의 원인이 양반 사회와 유교에 있다고 보았으며, 신분차별과 지방차별을 철폐하고 사회를 개조하기 시작한 기독교의 공헌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 22장 “병인 평양 양선사건”에서는 비판적 서술... (188)
1) 『도마스 목사전』(1928)
- 1928년에 출판된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확정... 문서사와 구술사의 방법을 종합한 전기... 한국인이 쓴 학문적인 근대 전기의 효시... 호교론적 관점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188)
- 8월 20일 대동강 입구 보산에서 천주교인들에게, 포리에서 홍신길 등에게 반포하고, 21일 석정호 부근 마을에서 김영섭 등에게 『진리역지』 등의 전도책자와 성경을 반포... 불타는 배 위에서 “예수”를 외치며 “한손에는 백기(白旗) 잡고 한 손에는 성경(聖經) 들어” 많은 성경을 뿌렸다고 서술... 체포 후 처형하는 군인에게 성경을 전하고 기도한 순교자의 모습을 부각...(189)
- 극적인 광경을 목격한 인물로 외성에 거주하던 황명대(당시 약 20세, 1928년 조왕리교회 출석)를 제시... 대동군 거주자로 현장을 목격하고 성경과 포탄을 보관한 김정필의 아들 김진효(1928년 강서군 동진면 난포리교회 출석), 1892년 초기 전도 때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 들었다는 한석진 목사(1928년 1월 16일 자 편지)를 간접 증인으로 제시... 한석진의 편지처럼 토마스가 배에서 성경을 투척한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최후 기도나 처형하는 군인에게 성경을 주었다는 것은 지나친 미화 작업으로 보인다... (189-190)
- 처형에 참여한 박춘권이 초기 교인이 되었다. 12세 소년 최치량이 가지고 온 한문 성경을 벽지로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이 개종... 나중에 그 집을 사서 여관을 경영한 최치량은 개종 후에 여관을 널다리교회로 기부... 20세 부인 이신행이 성경을 받고 개종하여 장대현교회 전도부인이 됨... 김창구도 성경을 받아 후에 개종... (190)
- 강서군 지포리의 천주교인들은 토마스를 만나고 성경을 받은 것이 발각되어 1866년 9월 23일 9명이 체포... 지달유는 옥에서 사망... 지달해와 지달수는 이듬해 1월 22일 보통문에서 참수... 감히 양인과의 접촉사실을 밝히거나 성경을 읽는 자는 없었다. 1893년 1월 최치량과 평양 장로교인 7명의 첫 세례는 마페트의 전도 결과... 박춘권은 토마스 처형에 참여한 자가 아니고 목격자... 사건 발행 후 33년이 지난 1899년에 77세 노인으로 세례를 받았다. (190)
- 1928년 10월 서울 경신학교에서 선교사 쿤즈의 선교 25주년 겸 교장 15주년 행사... 연극 ‘순교자’... 1932년 3월 26일부터 4월 8일까지 소설가 김동인은 「동아일보」에 소설 <순교자>를 12회 연재... 오문환의 서술을 거의 그대로 수용... (190-191)
- 1932년 5월 오문환은 자신의 전기를 영어로 정리하여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에서 논문으로 발표... 토마스를 처형한 군인 전 씨... 처남의 증손자가 이재풍 목사의 두 아들로서 자신과 함께 숭실대를 다녔다고 보완... (191)
- 1932년 3월 토마스기념예배당이 착공되어 7월에 완공... 토마스의 무덤이 있는 봉래도 남쪽, 강 건너편 언덕 조왕리...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 기간인 9월 14일 낙성식... 스코틀랜드 성서공회(NBSS)는 터툴리안의 말 “The Blood of martyrs is the seed of the church.”를 새긴 머릿돌을 기증... 기념엽서 발행... (191)
2) 선교 희년과 토마스, 1934년
- 1934년 9월 선교 희년대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만든 ‘장로교회 목사’ 토마스를 ‘조선장로교회의 최초 선교자’요 교회를 세운 희생 제물로 ‘순직’했다고 부각... (192)
- 마페트를 편집인으로 토마스목사순교기념전도회의 기관지 「殉敎者」(순교자)가 발간... 전도회가 추진한 5대 사업은 역 대합실 전도 간판 설치, 전도 씰 발행, 도마스호 건조, 낙랑 전도계획, 회보 발간... (193)
- 일반 학계에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평양 양란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유지했다. 문일평 1934년 3월 31일 「조선일보」 기사... ‘미선소파사건’ (193)
- 연희전문학교 교수 케이블 선교사... 오문환이 토마스가 한국어를 배운 후 성경반포와 전도를 통해 개신교 선교회를 수립하기 위해서 평양에 왔다는 순수 선교적 동기를 주장한 것에 대해서 케이블은 “나는 그의 가설이 맞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평가... (193)
3) 오문환의 친일 행위, 그리고 토마스를 미제 침략의 선봉으로 만든 일제
-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신사참배 문제로 숭의여학교가 폐교되는 위기가 닥치자, 34세의 야심가 오문환은 친일파가 되어 돈과 권력의 자리로 나아갔다. 그는 1938년 4월 평양기독교친목회를 조직하고 상임간사로서 신사참배를 지지하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했다. 1938년 12월에는 평양의 목사와 장로 등 12명을 인솔하여 북중국 지역의 일본군을 위문했다. (193-194)
- 1939년 총독부는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외국 선교사 기념사업을 중단시켰다. 토마스기념교회도 조왕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교회에 세워졌던 NBSS의 기념비도 시멘트로 뒤덮였다. 오문환은 『비상시국과 기독교』를 저술하고 내선일체에 앞장섰다... 1940년 6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기관지인 「총동원」에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회전”을 기고... 12월에는 ‘기원 2600년 봉축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총무로 일했다. 1941년 4월 기독교서회 임원진을 조선인으로 재조직할 때 ‘松浦文雄’으로 창씨개명한 오문환이 영업총무로 선임되었다. 6월에는 양주삼, 정인과, 백낙준과 함께 일본 기독교 출판계를 시찰... 신궁참배도 겸했다. 당시 전 일본 개신교 교파 합동으로 ‘일본기독교단’ 창립 총회가 열렸으므로, 양주삼과 오문환 등은 단일 조선교단을 형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연극 <대동강>과 <낙랑>을 상연하고 토마스의 내한을 미제 침략의 선봉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오문환은 신사에서 일본의 승전을 기원했다. 그는 1942년 1월 재단법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이사, 4월에는 기독교신문협회의 이사가 되었으며, 6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로 일본군에 자동차 2대를 헌납 (194)
50주년부터 100주년 이전까지 (2), 1945~65년
1) 해방 이후 오문환의 토마스기념사업과 반공
- 친일파였던 오문환은 서울로 내려와 언론과 교육 사업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 토마스순교기념사업에 반공을 더하여 과거를 지웠다. 2011년 오문환의 자녀들이 편찬한 부친의 논저 자료집은 오문환의 신사참배 문제 등은 침묵하고, 대신 1944년 오문환이 정방산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으로 몰려 평양 일본 헌병대에 검거되어 투옥되었으나, 해방으로 살아났다고 강조... 해방 직후부터 남한에서 생존하기 위해 주장한 내용이었을 것... 「경성일보」 초대 사장에 취임... 1946년 「조선일보」가 복간되지 상임고문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숭문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4-195)
- 1946년 8월 19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주기철, 최봉석, 최상림, 박관준 등 신사참배 관련 순교자 50명에 대한 추도회가 단체 ‘새사람’ 주최와 「기독교신문」 후원으로 열림... (195)
- 오문환은 1947년 토마스목사순교기념전도회를 조직(총무 겸 사업부장 오문환, 전도부장 이승길, 교육부장 김낙수, 편집부장 정재면, 후생부장 박승원) 기관지 「백령」을 발행하고, 복음선 2척과 회원 15명으로 연안, 옹진, 연평도, 백령도에 전도하여, 황해노회를 설립했다. 1947년 9월 3일에는 토마스 목사 순교 81주년을 기념했다. 1948년 「기독공보」를 맡아 운영했으며, 1949년 흥사단이 발행하던 「한국일보」를 인수했다. (195)
- 6ㆍ25 전쟁 발발... 부산에서 1950년 9월 토마스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부산에 본부를 설치하고 피난민 수송을 후원하는 시국봉사를 하는 한편, 친일파였던 김길창 목사와 손잡고 1951년 2월 도마스호를 진수하여 거제도 등 섬 전도를 계속했다. 그해 4월에는 『토마스목사기념 25년 약사』를 출판... 1951년 성탄절에는 어린이용으로 소설 『순교자 도마스 목사』(남향문화사)를 발간했다. (196)
2) 토마스 순교 90주년(1956년)과 오문환의 친미 사관
- 1953년 서울에 돌아온 후 광신상업고등학교를 재건... 1954년 미군대한원조와 미국기독교아동복리회의 원조를 받아 영등포구 상도동에 남북애육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았다. 1958년에는 학교법인 계명의숙을 설립, 장안중학교와 남산고등학교를 재건... (196)
- 오문환은 1956년 토마스 목사 순교 90주년 기념사업을 주도했다... 토마스의 행방을 조사하기 위해 평안도 연안을 탐사한 쉐난도어호를 타고 방문한 마티어의 한국 활동을 소개... (196-197)
- 1956년 10월에는 「조선일보」에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관련된 신미양요와 작약도에 대한 글을 연재... 지나친 친미적 역사 이해... (197)
결론
- 토마스는 정기 항로가 없는 상황에서 무장한 아편선을 타고 조선의 내륙 평양까지 침입해 들어오는 제국주의 시대 선교 방법론을 가진 인물이었다. 무고한 양민을 죽이고 평양 중군을 인질로 삼는 등 침략 행위를 한 이양선의 통역자요 대변자였기 때문에, 상선 파괴와 선원 몰살에 관하여 책임을 면할 수 없다. (198)
- 완벽한 순교자나 성자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20대 청년 선교사로서 성경을 전했던 토마스의 모습을 상반된 증언들까지 그대로 서술했더라면 오히려 토마스를 순교자로 보는 일에 대한 논쟁은 지금보다 줄었을지도 모른다. (198)
- 천주교회가 병인박해 60주년을 맞아 순교자들을 복자로 시복하는 일에 자극을 받았는지, 오문환과 교회 지도자들은 개신교회와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의 장로교회에도 유사한 순교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완벽하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지닌 순교자였더라도 좋았겠지만, 그들은 영웅을 만들고자 했다. 토마스의 부족한 모습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서술할 수 없었던 청년 오문환의 시대적 한계도 아쉽게 생각한다. (198)
- 1) 1866년 대동강에서 실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사실 규명 못지 않게 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했는지를 연구하는 해석사의 중요성... 1860년대의 척양론, 그리고 1920년대의 사회주의의 반기독교론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순교론이 대립함으로 인해 사실, 증언, 기억이 왜곡되었다... 사관과 신학은 변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한 시대의 신학의 약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2) 해석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의견이나 반대파 학자들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태도가 중요하다... 한 사관이 진실을 다 보여주지는 못하고 진리를 독점할 수도 없다... 과거를 하나의 틀로 해석하려는 단선적 사고가 바로 과거라는 시공간을 식민지로 만드는 제국주의적 사고이다. 과거는 우리의 점령과 통치를 기다리는 수동태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경청하고 배워야 하는 능동태적 생태계이다... 3) 순교 담론을 생산하는 학자나 작가가 반드시 삶에서 순교 정신을 구현하지 않는다는 역설... 오문환이 왜 그렇게 토마스의 순교에 매달렸는지... 기독교인의 모습은 선명한 사관이나 성공한 사업보다 일관된 인격과 깨끗한 삶에서 드러난다. 선교사 토마스의 순교를 순교답게 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역사가들의 책임인 동시에 그의 순교를 기리려는 기독교 공동체의 삶이다... (19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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