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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한 (2007). 한석진 목사와 일본 선교. 선교와 신학, 19, 117-148.
- 토착 교회 민족 주체성이 선교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
I. 서론
- 한석진 목사는 한국 교회 초기 자생적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면서 한국 교회가 민족 종교로 자리잡는 데 크게 기여한 한국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자생적 신앙공동체’... 선교사의 한국 선교 정책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한국 교회’를 설립하는 주도적이면서도 독보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토착 교회의 민족 주체성이 선교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중요한 주제가 됨과 동시에 초기 한국 교회의 원형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 (118)
- 한국 교회가 일본에 파송한 첫 번째 선교사...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교회 설립... 한국 장로교에서 파송된 첫 일본 선교사로서 그는 본래 일본에 단 한 달만 파송된 선교사였다. (118)
II. 본론
A. 한국 기독교의 한 원형(元型)인 ‘자생적 신앙 공동체’
- 스코틀랜드 출신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 1874년 10월 이부부터 본격적으로 만주 지역의 한국인들을 찾아 나섰다... ‘고려문’이라는 작은 마을... (120)
- 백홍준, 이응찬, 서상륜, 서경조 같은 의주 지역 청년들... 한국인 첫 개신교 신앙공동체를 형성... 한문에 능통하고 학식이 풍부...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의식을 소유...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한 욕구가 강함... 대부분 상인들... 1879년에 백홍준과 이응찬, 무명의 2인이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 (120-121)
- 권서를 통해 신앙공동체가 형성됨... 철저히 성경을 중심으로 살았다... ‘자생적 신앙공동체’ (121-122)
- 1884년 9월 20일 미국 의사 알렌이 첫 번째 한국 거주 선교사로 입국... 광혜원(제중원)이 설립... 제중원을 중심으로 ‘선교사 공동체’가 형성... (122)
- 1866년 말과 1887년 초에 두 공동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 서상륜... (123)
B. 구한말 한일 기독교 교류사
1. 일본에 형성된 한국인 ‘자생적 신앙 공동체’
- 이수정... 신사유람단에 끼어 1882년 일본에 가게 되었다... 1883년 4월 29일에 일본에 와 있는 미국 선교사 녹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짐... (124)
- 일본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 중... 톰슨이나 매클레이... 1884년에 부산을 방문하기도 함... (124)
- 일본에서 형성된 한국인 유학생 중심의 ‘자생적 신앙 공동체’는, 1885년 이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서양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은 한국 선교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던 것... (125)
- 한국 유학생 중심의 ‘자생적 신앙 공동체’가 한국과 일본 사이의 기독교 관계 역사의 첫 단계... (125)
2. 일본 기독교의 한국 선교
- 두 번째 단계는 일본 기독교가 한국에 대해 선교적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단계... 일본 기독교계의 첫 잡지 『칠일잡보』에 한국 관련 기사가 등장(1876년 4월 21일)... 강화도조약의 소식을 전하며, “홀로 천지를 만드시고 만유를 관리하시는 전능의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에서 나온 것”이라는 평가... (125)
- 일본 교회에서 한국인 전도 문제가 처음 논의된 것은 1878년... 일본기독교 일치교회의 제2 중회가 한국 전도를 위해 일본인 전도자를 파송하는 문제를 논의한 기사가 『칠일잡보』에 실림... 1879년 10월 3일 『칠일잡보』에는 한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 기독교인이 동경에 있는 신도들 앞으로 전도사 파송을 요청하는 편지가 왔다는 내용을 전함... (126)
- 1883년... 일본 기독교인들의 한국 전도가 보다 적극성을 띠게 됨... 『복음신보』... 한국에 성서 판매지점을 설립하기를 원하며, 한국에 파송할 권서를 모집하는 광고... (126-127)
- 일본이 제국주의적 본성을 드러내며 한국에 대한 식민지 침탈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는 1890년대 들어서면 일본 기독교인들의 ‘조선전도론’ 역시 식민지 확장 논리와 결합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 (128)
- ‘조선전도론’에 변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전도할 것’과 ‘조선의 유망한 청년을 일본 기독교회 소속의 신학교에 입학’시키자는 것... “조선은 원래 일본과 정치적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이 전도하여 그들을 감복시키는 것은 몹시 어렵기에 우선 유망 청년을 길러서 장래의 전략을 짜야”하기 때문... (129)
- 우선 일본 내지 선교에 충실하고 그 기초 위에서 해외 선교를 해야 한다는 신중론... (130)
- 일본 기독교의 왜곡된 ‘조선전도론’... “한반도의 국민이여, ... 여러분은 참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탁월한 식견의 빛에 비추어 온유, 겸손, 인내의 미덕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맛보고 일본이 귀국을 포용한 두 팔 안에는 하늘의 심원정대한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귀국의 문명은 오늘 이후에 처음으로 이야기하기에 족한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풀이하겠다. 귀국 국민을 지도하는 데 하늘의 공도(公道)를 의지하지 않고 폭도의 방법에 의지하는 자는 귀국을 최후의 멸망에 이르게 하는 사자 몸 곳의 버러지다. 다시 말하자면 즉 도적이요 강도다. 귀국 국민 중에서 가장 현명한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백년 년 후를 달관할 안목을 가지고 죽음을 각오하며 불명(不明)의 무리를 개발, 지도해야 한다.” (132-133)
- “한국의 합병은 이미 예기되었던 것이지만 드디어 사실이 되어 발표되니 모든 사람이 새삼스럽게 일종의 감회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번의 일이 실로 일한(日韓) 양국 국민의 행복을 이루는 유일한 길임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일본인은 이미 한국 전도의 일을 구미 선교사에게 일임하면 된다고 말할 수 없다. 한인은 이제 일본의 신민(臣民)으로서 우리의 동포 국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경우 한인 1천만 명의 참된 행복은 전적으로 일본인과 동화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참으로 일본인과 잘 동화시킬 길은 일본인의 손에 의한 기독교의 전도를 통하는 것밖에 없다... 일본의 기독교인은 지금 이러한 중대한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132)
- 한ㆍ일 기독교 관계사의 두 번째 단게... 일본기독교의 ‘조선 전도론’ 주창 시기... (132)
C. 첫 일본 파송 선교사 한석진 목사의 교회사적 의미
- 한석진 목사의 일본 선교는... 일본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을 위한, 곧 미래의 우리 민족과 한국 교회를 위한 투자의 성격... (133)
- 1개월로 제한... 총 3개월을 머뭄... (133)
- 1909년 9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개최된 제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는 한석진 목사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결정... 1) 앞으로 발행될 장로교를 대표하는 신문의 발행 책임을 맡긴다... 2) 신문 발행 일을 수행하기에 앞서 일본 동경에 가서 한달간 한국 유학생들을 돌보고 오라는 것... (133)
- 일본의 한국 유학생... 1880년 첫 한국인 유학생...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 개화파가 성장... 이수정이 1886년 5월에 귀국하면서 일본의 ‘자생적 신앙공동체’의 활동이 중단... 유학생 중에 기독교인들은 일본인 교회에 나가기를 꺼려하였고,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 창립의 필ㄹ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기 시작... (134-135)
- 1906년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인기독교청년회’(YMCA)가 창설... 초대 총무는 김정식... 독립협회 지도자요 옥중 개종자... 출옥후에 연동교회에 출석하였고,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창설의 주역이 되어 부총무로 활동... 창설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유학생들은 백남훈과 고당 조만식... 오순형, 장원배, 장혜순 등이 초창기 동경 한국YMCA의 핵심 회원들... 이 동경의 한국 YMCA 를 중심으로 결집해 있던 ‘자생적 신앙 공동체’는 1908년 들어 교회 설립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낌... 평양장대현교회 장로이면서 ‘평양예수교서원’이라는 서점을 운영하던 정익로가 그해 3월 동경을 방문... 교회 설립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적극 추진... 제2대 동경 한국YMCA총무가 된 백남훈의 증언... (135-136)
- 동경의 ‘자생적 신앙공동체’는 고국의 장로교 독노회에 교회 설립을 위한 목회자의 파송을 정식으로 요청... 장로교 독노회는 이 요청을 1909년 9월에 열린 제3회 독노회에서 중요한 정식 안건으로 다루게 되었다... 한석진은 동경에 있는 김정식, 백남훈, 조만식, 정익로 등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37)
- 독노회의 고민... “일본은 명치유신 이래 서구 문화를 전적으로 받아들여서 크게 발전되었고 그 실력을 뒷받침으로 우리 나라를 강점하려는 야욕이 노골화되어 보호 조약을 구실로 내정 간섭에서 전적 병탄으로 급진전되어 가는 때이었으므로 동경 유학생의 위치가 미묘한 데다가 적어도 일본이 수도에 가서 굽히지 않는 지도자가 되려면 그 인격에 있어서나 지식에 있어서나 탁월한 인물이 아니어서는 아니 되겠으므로 동 노회는 신문사의 사장의 중임을 맡은 한 목사를 일시나마 동경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37)
- 1) 이미 서구화된 일본의 문화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개화된 인물... 2)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으로부터 유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는 민족 의식이 강한 인물... 3) 한국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일본이 수도에서 활동하려면 인격이 탁월한 인물... 4) 앞서 문명을 배우러 온 유학생들이니만큼 그 지식에 있어서도 탁월한 인물... (137-138)
- 한석진 목사를 통해 초기 한국 기독교의 ‘원형’의 두 흐름이, 즉 만주의 ‘자생적 신앙 공동체’와 일본의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역사적으로 만나는 것... (138)
- 한석진 목사는 1909년 9월의 독노회가 마친 후 곧바로 여장을 준비하여 10월에 동경에 도착... 동경에서 가까운 간다(神田)라는 지역에 별도의 가옥을 세내어 한국 YMCA사무실 겸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3개월을 동경에 머물며 교회의 기초와 틀을 잡아 놓은 후 귀국... (138-139)
- 제2회 총회록과 제3회 총회록에 ‘동경한인교회’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보고가 기록... (139-140)
- 1910년에 임종순 장로와 박영일 장로를 파송... 1911년에 임종순 장로가 목사가 된 이후 정식 담임목사로 파송되어 교회를 이끌어나갔다. 점차 감리교인들도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1911년부터는 본국의 장로교화 감리교회 목사 파송을 요청하여 2년씩 교대로 두 교파 목사들이 파송되어 목회를 하는 형태로 바뀜... (140)
- 일본 땅에서 방황하던 자생적 신앙 공동체는 자칫 그들의 운명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함께 스스로의 자괴감에 의해 사그라질 운명 앞에서 한석진 목사라는 인물을 만나 다시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하도록 소생한 것이다. (141)
D. 한석진 목사의 민족의식을 통해 본 바람직한 선교관
1. 선교사와 토착 지도자의 관계 : 자생적 신앙 공동체와 선교사 공동체의 매개
- 처음 ‘자생적 신앙 공동체’와 ‘선교사 공동체’의 만남은 세례를 매개로 하는 것이었다. (141)
- 그와 선교사들의 관계는 주종 관계가 아니었다. 한석진 목사는 그 스스로 주도적으로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도의 과정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교 과정에서 토착 기독교인들의 자발적 헌신이 건강한 교회 형성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42)
2. 전통 문화의 고수와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개방성
- 전통 문화에 대한 강한 의식... 동시에 새로운 문화에 대한 과감한 개방성... 졸업사진...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데에는 전통 문화를 업신여기거나 우상으로 취급하는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복음으로 인한 개방성... (142-143)
3. 주체적인 토착 기독교 형성의 과제
- 그는 결코 한국 교회가 서양 교회의 축소판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자주성 없는 신앙은 외국 사람인 선교사에게 노예 노릇을 자청하는 것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던 토착 지도자였다... (143)
- 191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첫 서기...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경을 정하는 역사적 결정에 참여하고 교회의 신앙 표준을 정립했다.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정치 제도를 수립함에 있어서 한국인 지도자들이나 외국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장로교회의 정치제도를 우리 문화 환경에 알맞게 제정하였다... 한국 교회가 자진 전도(自傳), 자력 운영(自立), 자주 치리(自治)의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한 독립교회가 되어야 했다... (144)
- 한국 교회사가인 백낙준은 그를 “우리나라 초대 교회의 터전을 다지고 기초를 쌓아 올린 개척자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 (144)
III. 결론
- 초기 한국 교회의 원형은 ‘자생적 신앙 공동체’이다... 한석진 목사의 일본 선교는 이 초기 일본 ‘자생적 신앙공동체’와 만주 ‘자생적 신앙공동체’라는 두 흐름의 합류임과 동시에 일본의 ‘자생적 신앙공동체’를 다시 한국 민족 교회사 속에 회복시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 그리고 일본 기독교의 ‘조선 전도론’이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적 선교의 한계를 신학적으로 직시... (145)
- 토착 교회의 강한 민족적 주체성은 건강하고 자립적인 토착 교회 형성에 매우 중요한 요소...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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