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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호(2006). 개화기 조선의 간도인식과 정책의 변화. 동북아역사논총(14), 7-31.
I. 머리말
- 1880년대 들어 간도지역의 영역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국 양국간 대립이 첨예... 1883년 어윤중의 감계 제의에 따라 1885년, 1887년 두 차례 걸쳐 영토 문제에 대한 담판... 1885년 청일전쟁에서의 청국의 패전,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인한 러시아의 간도 점령, 1905년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 등으로 조선의 간도지역에 대한 영토 인식과 정책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7)
- 화이론적 세계관이 만국공법적인 인식으로 전환되고 정책에서도 그대로 변화가 반영... (7)
- 청일전쟁 이후 청국의 내정 간섭이 불가능해진 이후 조선은 대한제국시기에 들어 간도를 자국의 영토로 인식하는 의식이 확산되고 나아가 간도의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다. (8)
II. 간도 문제의 발단과 영토 의식의 변화
- 전통적 영토 의식은 경계선보다는 거점 개념... 주요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산천을 경계로 주변의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 것이 전통적 영토의 지배방식... 전통사회의 영토전쟁 역시 대부분 거점 획득을 위한 것... 근대 국경선과는 달리 전근대의 경계 개념은 상대적으로 불분명... (9)
-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으로 하여금 거점 중심의 영토의식을 국경선의 개념으로 전환시킨 조약... 백두산정계비 문제도 이같은 청국의 경계 의식으 성장과 관련이 있었다. (9)
- 1708년 프랑스 신부 레지스 등을 파견해 서양식으로 산해관에서 동북지역을 측정하고 지도를 제작하도록 하고 이듬해 요하유역을 먼저 측량... 그들은 백두산 남쪽 기슭, 압록강원과 도문강원 지역은 측량하지 못했다. (9)
- 백두산을 청조의 발상지로 받들면서 만주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한 중국은 마주지역에서 러시아와 조선과의 국경지역의 경계선도 확정하려 했고, 백두산정계비의 설치는 그 결과였다... 조공체제 아래에서의 강압적 관계에서... 정한 것... (9)
-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경우 봉금지역에 들어간 자들을 참수하는 등 엄하게 다스려 범월을 경계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대개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그 이남을 영토로 인정했다. 이 경우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었다. 조선후기에 그려진 지도의 상당수가 두만강과는 달리 백두산의 북쪽으로 토문강을 표시했던 것은 이같은 사정을 보여주는 것... (10)
- 19세기 중엽 무렵에 이르면 압록 두만 양강의 강변지대에서는 청국과 조선이 유민이 유입되면서 개간이 이루어지고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다... 1867년, 1869년, 1870년 흉작 이후 이주는 급증... 특히 1869년 무산부사 마행일의 포홈으로 무산지역 인민이 대거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10)
- 1872년 간도지역을 탐문 조사한 최종범의 『강북일기』... 하경고 삼수군에서 평안도 후창군까지의 압록강 건너의 청금동까지 400리(160km)지역 18개 부락을 합해 이 지역 자치구역으로 1會上이라 하는데 조선인 193호 1673명이 정착하고 있었다. 또 청금돈 아래 삼도구에서 往絶路(왕절로)까지 150리(60km)에는 277호, 1465명이 살고 있었다... (11)
- 1869년 회령부사 홍남주는 민생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월강 개간이 최선이라 판단하고 주민들을 동원해 개간 청원서를 내게 한 후 이를 허용하는 형식을 빌어 두만강 대안지역을 개간하게 했다. (11)
-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지역에 조선인들의 집단 이주와 개간이 활발해짐에도 청의 단속은 극히 소홀했다... 조선인들은 봉금지대의 출입금지가 해제되고 거주나 경작이 허용된 것으로 보았다. (11)
- 1867년 청국은 동북지역에 대한 봉금정책을 폐지했다. ‘봉금’을 해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매우 적극적인 개간 정책을 추진하였다. 청국은 1860년 북경조약 이후 연해주 지역을 러시아에 내줌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영토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청국의 영토의식은 간도지역에 반영되어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고 두만강 이북의 간도지역을 영토로 확정하려 했다. (12)
- 1881년 훈춘에 설치된 초간국에서 조사위원을 파견... 길림장군 명안과 오대징은 두만강 대안지역의 조선인에게 조세를 부과하고 호적을 훈춘과 돈화현 관할에 올려 청국인으로 귀화시키자고 주장햇고, 청국 정부는 이를 조선에 통보했다... 지역에 대한 지리적 지식이 없었던 조선정부에서는 경계문제는 청국의 주장에 따랐지만 간도 지역의 조선 인민은 포기할 수 없어 쇄환하기로 했던 것... (12)
- 조선의 정부는 봉금과 관련해 두만강을 범월의 경계로 삼고 있어 청국의 주장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개간으로 생활의 근거지를 간도에 가지고 있었던 조선인들은 청의 요구에 반발했다. 두만간 대안지역 거주하던 주민들은 직접 백두산에 올라 정계비의내용을 확인하고 토문강원을 탐사했다. 이를 근거로 종성, 온성, 회령, 무산 4읍의 변민이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소장을 내고 두만강과 토문강은 엄연히 별개의 것인데 이를 같은 것으로 보고 두만강 이북지역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려는 청의 시도는 부당하다고 주장... 이에 대해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김우식을 파견해 정계비를 조사하도록 했다. (13)
- 어윤중은 고종에게 두만강 북에는 또한 토문강원이 있어 백두산 분수령에 사람을 파견해 경계선을 조사해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청조에 도문강 이남의 중간지대는 조선영토임을 통고하고 이의가 있으면 재감계할 것을 1884년 청국 예부에 문서로 전달하고, 1885년 정식으로 사절을 보내 감계에 대한 공문을 보냈다... 1885년, 1887년의 감계회담... (14)
- 종래 거점 중심의 전통적 영토의식이나 봉금문제로 경계가 불분명했지만, 조선의 중앙정부 역시 봉금지역의 범월 문제와 관련해 두만강을 경계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청국의 간도지역 조선인의 귀화방침에 인민을 쇄환하려던 조선 정부는 이 지역 조선인에 의해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는 경계문제가 제기되면서 정책적으로 영토와 인민을 모두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 (14)
- 1884년 부호군 지경룡(池慶龍)은 간도지역의 국경 문제에 대해 상소를 올리고,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면서 중국과 담판해서 간도지역을 확보할 것을 주장했다... 전통적 조공체제에서의 화이론을 벗어나 만국공법적인 세계관에서 국경문제를 주장... (15)
- 1883년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전문에 조선을 속국으로 규정...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한 청국과의 관계는 근대 국제법과 관념적이지만 전통적 조공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16)
- 토문강 경계론은 1880년대에 들어 청국이 간도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확정하는 과정에서 조선 측에서 제기되었고, 감계회담이 열리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6)
III. 청의 내정간섭과 감계회담의 결렬
- 청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군대를 파견하고 이해 청의 종주권을 확인하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다... 1884년의 양국간 합의에 의해 1885년, 1887년에 이루어진 감계회담에서 청은 외교적으로 상대적 우위에 있었고, 회담 과정에서도 강압적 자세로 임했다... (17)
- 감계회담 이전에 이미 두만강 경계를 방침으로 삼은 청국... 회담 자체를 성과가 없게 만들었다... (17)
- 1887년 2차 감계 회담이 열리기 전 김윤식은 2차례에 걸쳐 원세개와 회담을 하면서 영토는 청국쪽 입장을 인정하되 ‘借地安民’(차지안민)을 주장했다. 김윤식이 말하는 ‘차지안민’은 간도지역을 청국의 영토로 양보하면서 간도지역에 대한 수세의 대행권, 소송, 통치권을 조선이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 국제법의 입장에서 간도지역을 영토로 확정하려는 청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윤식의 입장은 인민에 대한 지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전근대 영토지배 의식과 조공체제 아래에서의 ‘상국의 은혜’를 바라는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청의 강압적 경계 확정 요구라는 현실적 힘의 논리를 피해가려는 궁색한 변통론이었다. (19-20)
- 감계사 이중하의 토문강에 대한 파악... 이중하는 土門의 자연적 형태가 土門이기 때문에 이름을 명명한 것이며 강의 이름이 예로부터 토문강이고 조선의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으며 수백 년 전래된 이름이라고 하였다. (20)
- 청국이 조선의 토문강 주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중 하나는 토문강이 송화강의 상류로 그 동쪽을 경계로 할 경우 이중하의 주장대로 송화강 이동, 곧 길림까지도 영역 주장이 가능한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실제로 1886년 2월 원세개는 김윤식에게 정게비를 근거로 한 오도백하 상류를 토문강이라는 조선 측의 주장은 길림 전체가 문제가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20)
- 두 차례의 감계 회담은 청국의 강압적 경계 확정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조선 정부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은 채 결론을 맺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이 과정은 영토 의식의 성장과 함께 조선후기 이래 실학자의 토문강 경계설이 정부의 정책으로 되는 계기가 되었다. (21)
IV. 대한제국의 간도정책과 영토 의식의 성장
- 청일전쟁 후 조선은 간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1900년 의화단 사건 이후 청국의 통제력이 약화된 사정을 기회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정책과 시도들이 나타남... (21)
- 1897년 함경북도 관찰사 趙存愚는 경계문제를 탐색해 지도를 작성하면서 5개조의 영역문제를 제시했다...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오면 만국공법적 사고는 일반화되어 가고 있었고 간도 문제도 이에 의해 사고하면서 조선의 영역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22)
- 1898년 함경북도 종성 거주 吳三甲(前五衛將) 등이 간도의 감계 문제에 대해 상소하자 이듬해 내부대신 李乾夏는 함북관찰사 李鍾觀(이종관)에게 훈련을 내려 보고하도록 했다... 한청러 3국이 서로 회동해 백두산정계비를 감계하고 토문에서 바다에 이르는 땅을 답사해 각국통행지법에 의해 공평하게 타결해야 한다고 주장... 송화강 흑룡강 동쪽을 역사적으로 조선의 영토로 보고 이를 점거한 청국과 러시아와 국제법에 따라 영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22)
- 대한제국 시기 민족주의적 의식의 성장이 만국공법과 결합하면서 토문강설을 넘어 송화강 흑룡강 이동까지 영토로서 확보할 것을 주장하는 인식으로 발전... 오삼갑의 상소는 『황성신문』에도 게재되어 지식인 사이에 간도를 우리 영토로 보는 인식이 확산되는 한 계기가 됨... (22)
- 1897년 徐相懋(서상무)를 서변계관리사로 임명해 서간도 조선인을 보호하도록 함... 그러나 1904년 청국에서는 서상부가 통화ㆍ懷仁(회인)ㆍ臨江임강)ㆍ寬甸(관전) 4현에 있는 월간한민을 관리하기 위해 월계하여 建署하려 했던 것이 조약에 위배되므로 그를 징치할 것을 요청... (23)
- 청의 항의로 서상무는 소환되고 말았는데, 그의 소환에 대해 이기는 안타까워 함... 李沂(이기)는 압록강 대안 역시 우리의 영역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어 이 시기 민족 의식의 성장에 따른 영토 인식이 확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23)
- 1900년 평북 관찰사 이도행... 압록강 대안지역을 각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하여 이 지역 인민을 보호하게 했던 것... (23)
- 1901년 함경북도 대안 간도지역에 비적이 출몰해 조선 인민을 약탈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변계경무서를 회령에 두고 무산, 종성에 분서를 설치해 간도 인민의 위생, 행정 사법권을 관할하도록 했다. (23)
- 1902년 5우러 21일 이범윤을 간도시찰로 임명... 간도지역에서의 이범윤의 활동을 비난하는 청국 지방관에 대해 이범윤은 조약상으로도 우리 인민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고 만국공법의 통례라고 하면서 청국 관헌이 또 갖가지 명목의 잡세로 토색하는 것을 비판했다. (24)
- 김규홍... 군대 설치... 토문강 이남지역은 우리 강역으로 확정해서 수세해야 마땅하다고 했다. (24)
- 간도지역을 두고 양국 간에 영유권 분쟁이 발생하자 간도 인민들이 청인들에게서 받는 박해와 참상이 심해졌다... 양국인 사이에 충돌사건... 청국은 이범윤의 철퇴를 요구... 감계문제로 비화... 1904년 5월 14일 내부대신 이용태와 외부대신 이하영은... 황우영 의견서를 첨부하여 청원하였다. 황우영의견서는 경흥감리 황우영이 간도지역의 조선 인민의 참상을 보고하고 영역 문제를 만국공법에 의거 재조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25-26)
- 당시 한국은 러ㆍ일 간에 전운이 감도는 상황 아래에서 ‘국외중립’을 선언(1904.1.21)하였으며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를 체결(1904.2.23)하는 등 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매우 복잡한 감계의 문제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26)
- 이범윤은 간도관리사로 승진된 지 3개월도 못되어 경성과 종성군으로부터 철회의 독촉을 받았다. 이것은 경성군수가 의정부에 시찰원의 철회를 요청했기 때문.... 결국 간도분쟁은 정부 내 대신들의 갈등을 야기했다... 정부 관리들 간의 알력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변계관들도 간도 조선인의 보호보다는 이범윤을 철퇴시키는 방법으로 善後章程(1904.6.15)의 체결에 동의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범윤의 사포대의 활동이 억제당함으로써 간도의 실제 관할권이 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범윤은 러시아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이 이범윤의 철퇴로 간도 조선인의 참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27)
-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이 간도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간도정책은 일본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27)
V. 맺음말
- 전통적 영토 의식은 경계선보다는 거점 개념... 주요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산천을 경계로 주변의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 것이 전통적 영토의 지배방식...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으로 하여금 거점 중심의 영토 의식을 국경선의 개념으로 전환시킨 조약... 백두산 정계비... (28)
- 영토의식은 반드시 봉금문제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대개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그 이남을 영토로 인정했다. (28)
- 감계회담... 청국은 외교적으로 상대적 우위, 회담과정에서도 강압적 자세... (29)
- 두만강 경계설과 토문강 경계설... 감계회담을 통해 영토의식의 성장과 조선후기 이래 실학자의 토문강 경계설이 정부의 정책으로 되는 계기가 됨... (29-30)
-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로 그 동쪽을 경계로 할 경우 송화강 이동, 곧 길림까지도 영역 주장이 가능... 간도영토론을 넘어 송화강, 흑룡강 이동까지 영토로 보는 변경의식으로 발전... (31)
- 청일전쟁 이후 간도의 인민과 토지를 지배하려는 정책으로 전환... 청국과 충돌... 외교문제... 이범윤의 사포대 활동...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제의로 논의 중단... (30)
- 대한제국시기의 영토의식은 만국공법을 근거로 두만강 대안 간도지역을 대한제국의 영토로 인식랄 뿐 아니라 압록강 대안 역시 영역으로 주장... 나아가 토문강의 하류 송화강, 흑룡강 이동지역까지 영토로 보는 인식의 확장을 가져옴... 이같은 영토 인식의 확대는 이 시기 근대 민족 의식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는 것...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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