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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2019). 해석된 ‘만주’ - 동양사에서 본 만주의 의미 -. 만주연구, 28. 91-127.
I. 서론 : 만주의 의미
- 만주는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전략적 거점이기 때문에 ‘전쟁에서 반드시 쟁취해야 할 지역’이었다. 국제적 모순의 초점이며 아시아의 발칸으로 미래 동방 균형의 중심이기도 하다. (92)
- 교통로의 발전은 만주 지역 사회경제에 근본적인 변혁을 초래하였다. (92)
- 중국사회과학원은 ‘공정’이나 ‘항목’이라는 이름으로 내지와 변경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동북(만주), 서북(신강), 서남(티벳), 북부(몽골) 및 해강의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청사공정’을 통해 ‘한화된 만주족 청사’ 혹은 ‘중화민족인 만주족의 청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93)
II. 담론으로서의 만주
- 1990년 이래 미국에서 청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주제를 새롭게 연구하는 경향... ‘신청사’ (93)
- 신청사는 청나라 통치자였던 만주족 즉, ‘만주족의 중국’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시도... 중국은 전통적으로 정복 왕조가 자발적으로 중국의 방식을 따른다는 한화로 역사를 설명해 왔다. 그러나 청조를 한화의 개념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므로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을 이해함과 더불어 청 제국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94)
- 로스키는 만주제국이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만주족의 정체성으로 보았다. 마크 엘리엇은 청 제국의 근간인 팔기제도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과 민족 주권의 계속 유지되었다고 보면서 만주족의 제국이 바로 청제국이라고 보았다. (94)
- 크로슬리... 각각의 민족정체성을 고정적이고 오래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청대 민족정체성의 역사성은 모호해 지는 것으로 보았다. (95)
- 장팅은 중국 근대 민족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 한족 중심주의 제거, 청조의 제국성 재검토, 청조 세계성이 검토되었다는 점에서 신청사의 관점이 참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95)
- 신청사... ‘중국’이나 ‘중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낳았다. 신청사는 만주족을 역사의 주체로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이지만 이것 또한 한족 중심주의에 대별되는 만주족 중심주의라는 근단론이 있다고 비평되었다. 비록 만주족 중심주의가 될 수 있어도 100만도 안되는 만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던 저력은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만주족의 세계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95)
- 중국에서의 연구는 만주족이 ‘한화의 길’을 걸어 ‘중화민족’ 대가정에 융합되어 가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청사공정 및 수많은 역사 프로젝트... 청을 ‘중국’으로, 만주족을 ‘중화민족’으로 보는 중국의 현재주의적 역사관은 청제국의 만주족 정체성과 만주족의 한족 통치, 그리고 내륙아시아로의 팽장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95-96)
- 외부로부터 촉발된 ‘신청사’ 연구경향은 중국으로 하여금 더욱 더 변강지역에 대한 중국화에 박차를 가하게 하고 있다. (96)
III. 민족주의적 공간으로의 만주
- 만주는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정책과 만주 주변 지역의 정치적, 경제석 상황으로 인해 물밀 듯 들어오는 이주자들로 다양한 문화와 생활습관, 사고방식이 대립하면서 만주라는 공간을 이해하는 상호 인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또한 만주는 상호 이해를 촉구하는 교류의 장으로 다양한 민족이 각기 희망을 꿈꾸는 미래의 땅이자 각종 모순을 해소하는 완충지로 역할을 하였다. (96)
- 제국주의 침략을 지향하는 일본은 만주와 중국의 공간을 달리 인식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와 중국 국민주의 충돌의 산물이 만주국이라고 보기도 한다. (97)
- 만주를 중국과는 별개로 취급... (97)
-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만주를 조선반도와 하나의 역사지리적 공간으로 인식한 ‘만선사’ 시각이 대두되었다. 이는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와 만주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의 문제의식과도 연관성이 있다. (97)
- 만선사관은 1919년 3.1운동 이후 고조된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억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만선사 성립의 배경으로 중시하면서 만주사에 대한 조선사의 종속을 강조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목적으로 1920년대 만선사관이 확대되었다... ‘만몽사’적 시각... 중국역사와는 별개로 ‘만주’와 다른 지역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엮어 나감으로써 중국 내지와는 별도의 만주가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98)
- 일본의 만선사관은 1931년 만주를 침략한 만주사변을 계기로 1932년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만주사의 독립적 성격을 강조하였고, 만주사와 중국사의 분리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 지역이 만주가 아니라 동북으로 중국의 역사이자 영토임을 강조... 진위푸나 푸쓰니엔은 그러한 점에서 만주역사의 동북화 내지는 중국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와 같은 중국의 동북사 인식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 한족과 비한족을 모두 중화민족으로 보는 논리를 전제하였는데, 진위푸는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 고구려의 남진을 중국 동북사의 확장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99)
- 만주를 타자화 하려는 일본에 비해... 중국은 ‘동북’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전에 중국공산당도 이 지역을 ‘만주’라고 하였다... (99)
- 백두산도 중국화... 장백산... 중국의 변강ㆍ민족의식이나 동북공정, 장백산문화론 등은 만주에 대한 중국민족주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100)
- 만주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및 근대 변경문제를 둘러싼 한국의 고토의식도 잔존하고 있다... 만주백제설... 1910-20년대의 ‘만주=단군강역’론... 한국인에게 만주는 근대적 민족을 범주로 한 역사와 문명의 기원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100-101)
- 동아시아 제국가는 만주를 자국의 ‘정치적 의도’와의 연관성 속에서 민족주의적으로 활용하였다. 일본은 만선관계로 확대... 중국은 만주의 동북화... 한국은 ‘고토’의식을 명확히... (101)
IV. 동아시아 민족 이산과 융합의 다원적 공간으로서의 만주
- 만주는 역사적으로 혼합적이면서 다양성이 중첩된 것이었다... 만주는 민족 이산의 집결지니자 이 모두를 아우르는 동아시아 융합의 공간이었다... 만주는 다양한 민족의 공존으로 ‘아시아판 인종 전시장’이 되었다. (101-102)
- 제정 러시아 시기 유태인의 박해 정책과 시베리아 철도 부설로 유태인이 만주로 이주... 1917년 하얼빈의 유태인은 동북아 최대의 시오니즘을 조직할 정도였다... 만주국 수립,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유태인 수는 급감... (102)
- 이동진이 강조하듯, 조선인에게 만주는 디아스로파였을 뿐만 아니라 재만 조선인으로서 ‘식민’의 요소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경제적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경제적 보고이자, 억눌렸던 문화적 욕구를 배설하고 싹틔울 수 있는 실험무대... 제국주의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국가적 희망... (103)
- 19세기 말 만주족, 한족, 조선인 등 1700여만 명이 살았지만, 1940년에는 4300만명으로 확대... (104)
- 한중관계의 매개자이자 완충지... (104)
V. 갈등과 질서변동의 발원지로서의 만주
-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만주의 지정학적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케 한 전쟁이었다. (105)
-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 “언제라도 만주 문제가 대두되면 전 국민의 감정이 충전되어 가장 거대한 장애물로 등장하는 것이 두렵다”고 하였다. 전 세계의 관심은 태평양에 있고 태평양의 핵심은 중국에 있으며, 중국에서 가장 초점이 되는 곳은 만주이므로 만주는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106)
- 미국의 조셉 반스는 자연자원이 풍부한 만주는 일본ㆍ러시아ㆍ중국 등이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어서 1918년 이래 세계 평화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쳐 왔던 곳이라고 하였다. (107)
-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만주의 중국화’를 시도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 중원과 갈등관계였던 거란, 말갈, 달단, 만주족 세력이 모두 만주에서 성장했다... 역사적으로 만주 및 몽고를 장악하는 자는 북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쪽까지 전체 중국을 통제하였다. 만주를 포기하지 않아야 비로소 화북에 정착할 수 있었다. (107)
- 1920년대 말 만주를 장악했던 쟝쉬에량의 ‘동북역치’ 결단은 국민혁명의 결정판으로 중국 통일을 완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중국 측에서 보면 ‘동북역치’가 중국을 통일하는 데 기여한 ‘효자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면 ‘동북역치’는 일본의 만주 점령 계획을 구체화시켜 중국을 다시 혼란에 빠뜨리는 촉진제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매우 역설적이다. (108)
- 제2차 국공내전 당시 국민정부 장개석은 만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 (108)
- 국공내전 당시 만주는 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의 변화상으로 보았을 때도 특별히 중요한 곳이었다. (108-109)
- 세계평화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만주... (109-110)
VI. ‘관행’으로서의 만주
- 만주라는 공간에서의 ‘관행’은 만주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기타 지역과 다른 ‘관행’이 생겼다... ‘관행연구’... 중국의 사회 경제 관행 연구... 중국적 표준이 설정되는 장기지속적인 중국의 사회 경제 관행을 주목하는 이유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지속성, 반복성, 항상성, 명료성이 있기 때문... 중국 구성원의 동의를 통해 규범력이 인정되어 그 자체로서 사회적 강제력을 확보하고 있는 사회적 관행이 있기 때문... (110)
- 중국의 사회경제적인 관행... 만주 사회 구조 변화를 이해하는 특징으로 이민, 개방, 철도라는 키워드를 통해 사회 경제적인 관행을 확인할 수 있다. (111)
- 중국사회의 안정성을 이루는 내적질서는 종족 및 향촌 조직, 민간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청말 만주로의 이민 증가와 민간신앙의 확대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만주지역의 민간종교 또한 대규모 이민에 수반된 문화적 이식과 복제로 형성되었다... 만주지역은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하는 이주민이 종교결사에 더욱 의존하여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경향이 있다. (111)
- 경제적인 관행과 관련해서는 상회, 기업이나 토지 매매 등이 관행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관통하며 현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봉천의 상인단체... 봉천 상인단체에 대한 영향력이 중앙정부 차원의 정책이 아니라 지역 정권과 긴밀하게 관계했던 점도 특징이다. (112)
- 만주는 신개척지로 혈연 지연관계를 기초로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동향네트워크의 거점으로 동향회관을 세우고 상인단체를 조직해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조직과 상거래 방식으로 영업규칙을 정하고 상업 질서를 지키는 관행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113)
- 청대는 ‘기민불교산’의 원칙으로 기지를 민인에게 전매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으로의 이민이 확대되면서 민인에게 기지를 매매하는 것도 보편화되었다... 기지 매매 자체가 불법이므로 매매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매관행이 더욱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113)
- ‘경기둔간’... ‘은양기인’이라는 국가적 대원칙을 동요시키는 정책으로 후대의 자발적인 이민과 비교하면 국가가 강제한 이주이자 개간정책이었다. (113)
- 김지환은 일본경제와의 관계 속에서 만주 시장의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사건으로 동북해관 접수와 만주국의 재정운용과 자국산업 보호를 위한 관세정책을 꼽았다. (114)
- 만주에서의 관행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깊이 있게 분석되면 만주에서의 관행뿐 아니라 새로운 측면의 만주 모습도 그릴 수 있어서 기존의 만주라는 공간적 특성의 이해에 더하여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14)
VII. 결론 : ‘만주’ 실체 이해에 대한 제언
- 민족주의적 공간, 동아시아 민족 이산과 융합의 공간, 질서변동의 발원지뿐 아니라 만주에서의 ‘관행’이라는 차원에서도 해석되는 만주의 면모를 검토... (114)
- 만주의 다양한 면모는 만주의 특성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결... 만주가 경험하는 시대적 특성에 따라 만주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114-115)
- 1) ‘만주’라는 지역 그 자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한 역사자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 청조와 민국시기 관방 당안자료가 소장된 중국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성급 및 현금 당안관 그리고 북경 제1당안관에 소장된 각종 자료릐 발굴과 역사적 맬각에 부합하는 해석이 필요... 한족 중심의 자료뿐만 아니라소수민족 및 타자의 시선이 포함된 다양한 자료를 통해 만주이 실체를 다층위적으로 밝히는 것이 의미있을 것이다. 2) 민족주의적 요소의 재해석이 필요하다... 만주를 고대로부터 중국영토로 규정하고 중국사 차원에서만 연구하는 것은 역사성을 회복하는데 한계가 있다... 조선 세조대에 요동 인구의 3/10 정도를 차지했던 고려인이나 한반도에서 출발한 성씨라고 알려진 박씨의 만주 거주 등 경계인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만주를 바라보는 중심부와 주변부의 해체와 재건... 일반적으로 자신(자국)을 중심으로 나머지를 주변화 혹은 변경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체적화하는 데는 주변부 혹은 변경으로부터의 역사 인식, 즉 만주를 둘러싼 한반도,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지역에서 본 만주의 이해가 필요하다. 더불어 만주에서 본 중국, 한반도, 일본, 러시아 등의 역사 이해도 필요하다. (116-117)
- ‘만보산사건’... 민족의 공존과 역사의 공존은 일방을 다른 일방이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해야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 일방적인 복종과 갈등, 병렬적인 한중일 연대의 딜레마를 넘어 공존공영의 지혜를 어떻게 터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역사에서 배워야할 교훈이다. (117)
- 다민족과 다문화가 공존하면서 갈등은 반감시키고 평화로운 공존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주류와 비쥬류, 주체와 객체, 기득권과 소외자, 다수와 소수, 자아와 타자, 권력과 복종 등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서로를 개체화시킬 것이 아니라 상호 지속적인 교류와 소통을 통해 상호 타민족, 타문화에 대한 이해도와 수용력을 높여야 할 것이다. (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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