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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장현(2001). 라가츠의 종교적-사회적 운동에 관한 연구. 신학연구, 42. 323-343.
1. 들어가는 말
- 레온하르트 라가츠(1868~1945)는 그의 적대자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사회주의를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교회를 무자비하게 파괴한 파격한 사회주의적 행동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투철한 신앙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확실한 신뢰 속에서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를 갈망했기 때문에 부패한 교회와 불의한 사회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주의적 행동주의자이다. (323)
- 라가츠의 종말론적 신학의 출발점은 하나님 체험을 통해서 인식한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라는 주제에 집중되어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예수와 예언자들의 전통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 (323-324)
2. 종교적-사회적 운동의 출발과 그 신학적 의미
- 라가츠는 이미 쿠어 시절에 “오천 명의 급식”이라는 설교를 통해서 종교적-사회적 운동을 고백했으며, 또한 1906년 바젤에서 열린 열린 스위스 목회자협회에서 행한 “복음과 현재의 사회적 투쟁”이라는 강연을 통해서 종교적 사회적 운동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324)
- 라가츠의 종교적-사회적 운동의 신학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운동에 대한 두 가지 일반적 오해를 극복해야 한다. 1) 라가츠의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종교(또는 종교적) 사회주의와 동일시되거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될 수 없다. 그 경우에 이 운동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가 상실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종교사회주의는 단지 하나님 나라의 전망에서 해석된 라가츠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과 성서적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새로운 종류의 사회주의, 특히 기독교 사회주의의 급진적인 변종”이나 “사회민주주의의 종교적 일파”가 아니다. 2)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이라는 두 단어의 결합은 칼 바르트가 1919년 탐바하에서 개최된 종교사회주의자 회의에서 비판한 “하이폰 신학”을 의미하지 않는다... 라가츠는 하나님 나라의 양극성을 형성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진리를(벧후 3:10-13), 즉 종교적 메시지와 사회적 메시지를 이율배반적으로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단어의 결합은 바르트의 말처럼 단순히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혼합을 통해서 복음을 세속화하는 것이 아니라 라가츠 신학의 역동적 성격, 믿음과 행위의 일치, 내적인 삶과 외적인 삶의 일치, 영성(말씀)과 물성(빵)의 일치, 그리스도 사건과 민중 사건의 일치,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의 양극성 안에서 ‘종교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결합을 의미한다. 라가츠는 하나님 나라의 양극성을 형성하는 종교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결합을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진리로 이해한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을 통해서 일어난 이 온전한 진리의 분열과 어떤 한 극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신학적 오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정통주의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경직시켰고, 경건주의자들은 일방적으로 영혼의 구원만을 강조했으며,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칭의론을 강조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양극성 가운데서 어떤 한 극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종교적 빈곤이며 사회적 고난의 본질적 원인이다. (325-326)
- 라가츠에 의하면, 종교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결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간되심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종교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더 좋게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을 결합한 바로 그 사람이다... 라가츠는 이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제 종교적-사회적 운동과 함께 다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326-327)
3. 종교적-사회적 운동의 근거와 성격
-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블룸하르트 부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사실 라가츠가 종교적-사회적 운동을 고백할 때는 블룸하르트를 전혀 알지 못했다. (327)
- 라가츠 자신의 독특한 하나님 체험... 베른에서 강연을 마치고 바젤로 돌아가는 이등칸 열차에서 부르주아의 음탕한 속성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나의 삶을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을 체험했다. 나는 이러한 동물적 속성을 아직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다면 믿지 않을 것이다. 이제 모든 학문적 이상을 버리고 투쟁하겠다. 하나님 이것을 당신께 감사 드립니다. 나는 바젤로 도착할 때까지 하루 종일 많은 생각을 했다... 민중이 음탕한 부르주아보다 더 선하다는 생각을 새롭게 했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갈 것이다. 이제 새로운 사회적 기독교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의 인생의 새로운 시기를 1903년 2월 2일(오전 7-8시 사이)로 적었다.” (237)
- 라가츠의 종교적-사회적 운동의 근거와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이해해야 하며, 그것에 근거한 종교적-사회적 운동의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 (327)
1) 하나님 나라
- 종교적-사회적 운동의 메시지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이 세상을 위한 그의 나라”이다... 라가츠는 하나님 나라를 신 중심론적으로 ‘주’와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설명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칭호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라가츠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주어에 대한 술어이며, “주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성과 부성의 실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성은 배타적 기능을 수행하며, 하나님의 부성은 포괄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328)
- 라가츠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먼저 ‘주’ 하나님의 주성이 임하는 때와 장소를 의미한다. 그것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1) 기능적 의미로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세상에 맞선 하나님의 주성의 확립, 즉 “세상에 대한 통치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항하는 모든 권세들에 대한 통치이다.” 그것은 정치적 해방과 사회적 해방, 질병과 운명으로부터의 해방, 자연의 해방 그리고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우주적 구원”이다. 그것은 또한 창조의 회복과 계속으로서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의 회복을 의미한다. 2) 장소적 의미로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해방된 세계’이다. 그것은 추상적 진리나 죽어서 가는 피안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과 “현실에 대한 하나님 통치”이다. 그러므로 라가츠는 몰트만처럼 하나님의 놏이와 하나님 나라를 시간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현실성과 하나님 나라의 세상성 안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바로 그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현재를 규정하는 미래의 힘”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현재의 힘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저 세상의 일이 아니라 참으로 이 세상을 위한 일이다. (329)
- 종교적-사회적 운동의 혁명성은 바로 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현실성에 근거한다. (330)
-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 “하나님 나라는 오직 자유와 사랑으로만 건설될 수 있다. 그것은 자유로운 조합이다. 그것은 통치가 아니라 협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종래의 의미에서 어떤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의 자유롭게 형제적인 가족이다.” (330)
-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우선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인간을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만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라가츠는 종교적-사회적 운동을 통해서 이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다시 회복되었다고 생각한다. (331)
2) 종교적-사회적 개혁 운동
-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기독교를 사회주의화하거나 사회주의를 기독교화하려는 음모, 더군다나 하나님 나라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하여 이데올로기화하려는 시도라는 변증법적 신학의 비판은 종교적-사회적 운동에 대한 피상적 판단에 근거한다.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주의적 세계관과 결합된 과학적 사회주의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상실한 기독교를 다같이 비판한다. 사회주의는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 없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진리를 분열시켰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잘못된 물질주의에 빠졌으며, 기독교는 잘못된 영성주의를 추구한다. 라가츠는 하나님 나라의 양극성을 형성하는 성서의 “거룩한 물질주의”와 “거룩한 영성주의”를 통하여 이 잘못된 물질주의와 영성주의를 극복한다. 따라서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결코 종교적으로 색칠한 사회주의도 사회주의적으로 색칠한 기독교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도전과 교회의 위기 속에서 기독교의 사회적 의미와 사회주의의 종교적 의미를 이율배반적으로 통일시키려는 시도이며 실천이다. (331-332)
-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세속화된 교회와 불의한 사회를 동시에 개혁하려는 새로운 종교적-사회적 혁명이다. (332)
- 종교적-사회적 혁명은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혁명의 방향은 먼저 종교적 혁명으로부터 사회적 혁명으로 나아가며, 다시 사회적 혁명으로부터 종교적 혁명으로 순환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고난은 근원전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타락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가츠는 사회적 고난의 해결을 “하나님과 인간에게로의 철저한 전환, 성령을 통한 사회의 중생”,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새로운 도래, 성령의 새로운 강림”에서 찾는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적 사회적 운동은 “진리의 원천으로의 혁명적 귀환에 근거한 혁명적 전진”, 곧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하나님에게로의 후퇴 운동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전진 운동이며, “그리스도 사건의 새로운 개혁”과 그것에 근거한 사회적 혁명이다. 라가츠는 종교적-사회적 운동을 이데올로기화하지 않으며, 단지 “그의 증언을 위한 수단, 카이로스의 선포를 위한 도구”로 이해한다. (332-333)
4. 종교적-사회적 운동의 내용과 목표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하나님의 세계 혁명”을 의미한다. 그것은 “종교적-사회적 관계의 완전한 전환”이다.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혁명성에 근거한 종교적-사회적 혁명을 통해서 세계 혁명을 지향한다... 종교적-사회적 혁명의 절대적 목표(혹은 절대적 희망)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며, 상대적 목표(혹은 상대적 희망)는 하나님 나라에 상응한 세계 가족 공동체의 형성이다. (333)
1) 종교 혁명
- 종교는 타락의 근본 동기인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의지를 통하여 진리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것이 종교를 변질시키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종교적 소유”(정신적 또는 영적 소유)이다. 라가츠의 종교 비판은 바로 이 종교적 소유와 결합되어 있는 종교의 종교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에 집중되어 있다. (333-334)
(1) 종교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 종교는 폭력과 맘몬이 지배하는 불의한 세상을 신적 질서로 승인한다. 종교는 불의와 고난, 폭력과 맘몬, 전쟁과 질병, 심지어 죄와 죽음을 종말 이전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건으로 정당화한다. 이러한 종교의 행동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세계 혁명을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반동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종교 사이에 혈투가 일어난다. 예언자들과 예수의 종교 비판은 바로 이런 종교의 행태와 관련되어 있다. (334)
- 예언자들의 종교 비판은 가장 심오한 혁명으로서 모든 혁명의 유일한 원천이다. 라가츠에 의하면 예언자들의 종교 비판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위한 투쟁이며 동시에 바알에 대항한 하나님 자신의 투쟁이다. 예언자들은 바알과 본성에서 나오는 몰록 숭배 속에서 자연과 세상, 문화와 민족을 신격화하는 모든 세력과 투쟁한다. 2) 그것은 하나님의 소여의 전도된 관계에 대한 투쟁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사실, 원리, 조건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제1계명을 위반하는 우상숭배이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정치 투쟁의 동기이다. 3)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경직성에 대한 투쟁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으로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격려를 경직화하는 보통 제도에 반대하며 언제나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경청한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종교 비판은 원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에 대한 영원한 심판이다.” 그들의 종교 비판은 예수의 종교 비판에서 완성된다. (334-335)
- 예수의 종교 비판은 하나님 나라로 종교를 폐지하는 종교 혁명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종교적 복음이 아니라 ‘사회적’ 복음이다. 그것은 예수의 비예배적, 비교회적 태도를 반영한다. (335)
- 예수는 결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예언자들처럼 종교의 가장 큰 적대자이다. 예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해방된 세상을, 예배 의식이 아니라 정의를 원했다. 그는 형식적인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율법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기를 원했다... 이 같은 예수의 비종교적 태도는 종교에 대한 가장 강력한 혁명이 된다. (335)
- 예수는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로 종교를 폐지하기를 원했다. “하나님 나라는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오리혀 모든 종교의 폐지를 의미한다.” ... 예언자들이 주로 성전 중심주의를 비판한다면, 예수의 종교비판의 주된 대상은 율법 자체와 율법에 근거한 종교적 형식주의이다. (335)
(2) 종교적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
- 종교적 형식주의의 특징은 과시이다. 과시는 “종교와 경건이 결합된 가장 큰 악”이다. 라가츠는 과시의 종교적, 사회적 형태를 분석한다. 과시의 사회적 형태는 세상과 종교의 야합에서 발생한다. 세상과 결합한 종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이유를 앞세워 오지 권력, 지배, 명예 그리고 돈을 얻기 위하여 세상을 이용한다. 이런 종교의 행위는 세상을 거부한다는 가면을 쓰고 일어난다. 그러므로 종교가 세상을 멸시하고 부정한다는 말은 자신의 욕심을 감추기 위한 위선이 된다. 그와 반대로 자신의 권력욕, 탐욕, 폭력성을 감추기 위하여 종교적 승인이라는 가면을 써야 한다. 이때 종교는 자신의 탐욕을 위하여 불의한 세상을 신적 질서로 승인함으로 세상의 불의를 정당화한다. (336)
- 과시의 종교적 형태는 율법의 독특한 성격, 곧 외향성, 제한성, 그리고 유한성에서 나온다. 율법은 인간의 내면적 의지와 상관없이 밖에서 주어진 규제이기 때문에 인간을 위선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제한성와 유한성 때문에 성취될 수 있다. 따라서 율법을 성취한 사람은 그것에 상응한 보상을 요구하게 되고, 그 보상은 자기 의가 된다. 그리고 그 자기 의를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자랑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형식주의는 그 무한성 때문에 인간의 행위로 고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에 맞서는 가장 적대적인 힘이 된다. (336)
- 과시는 세상과 종교의 야합의 산물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가 상실된 결과이다. 위선자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종교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을 의지한다. 그러므로 과시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로의 귀환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예수의 종교 혁명은 그 본질에 따라서 사회 혁명이 된다. 그것이 예수의 혁명 방법이다. “그는 우선 종교적인 제한, 종교적 속박과 종교적 불안을 폐시한다. 이것이 사회 구원의 정점이다.” (337)
2) 사회 혁명
- 종교 혁명이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 속에서 인간의 자녀됨을 강조한다면, 사회 혁명은 하나님 안에서 일치성과 하나님의 완전성 속에서 인간의 형제됨을 강조한다. (337)
(1) 사회 분열의 원인과 종류
- 사회 분열의 근본 원인은 ‘소유’이다. “돈과 재물의 소유, 권력의 소유, 진리의 소유, 자유의 소유, 하나님의 소유 그리고 또한 선의 소유”는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하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을 분리한다. 라가츠는 사회과학적 인식을 결여하지 않으면서 사회 분열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원인의 배후에 놓여있는 종교적 원인을 탐구한다. 모든 소유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단절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의지를 통해서 타락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된 인간은 매우 공허하고 불안하다. 인간은 그 공허함을 채우고,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소유해야 한다. 이때 인간의 마음에 탐욕이 생기며, 이 탐욕의 결과가 소유의 형태로 나타난다. 불안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종교적 탐욕의 형태가 우상 숭배로, 사회적 탐욕의 형태가 물질(돈, 명예와 여자)의 소유로 나타난다. 사회 분열이 근원적으로 인간의 타락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라가츠는 사회 분열을 하나님 부재의 중병을 나타내는 증후군으로 인식한다. (337-338)
- 라가츠는 계급 투쟁의 역사를 현실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한다. (338)
- 라가츠는 소유를 하나님에 대한 범죄 행위로 규정한다... 소유는 “사회적 근본 불의”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대한 모독이다... 소유의 상징으로서 돈이 인간을 지배할 때 돈은 이제 교환 수단이 아니라 “물신 중에 물신”, 즉 “맘몬”이 된다... 라가츠는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하나님이냐 돈이냐!” 돈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의 전향, 이것이 사회 혁명의 출발점이며 본질이다. (338-339)
(2) 사회 분열의 극복
- 라가츠의 사회 분열에 대한 극복 방법은 철저히 성서적이다. 사회 분열은 양심을 양심을 자극하는 윤리적 설교로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분열의 근본 원인이 제거될 때 가능하다. 모든 사회 분열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원인에 근거한 하나의 분열이다. 그 근본 원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타락’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종교적 관계의 상실이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분열의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그 극복 방법은 ‘하나님에게로의 귀환’이다... 이러한 라가츠의 입장은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낭만적 혁명 이론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라가츠는 사회 문제의 분석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을 결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근원적, 혹은 시원적 뿌리인 종교적 원인을 신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339)
- 라가츠와 구터의 상이한 방법... 그들은 다같이 사회 문제를 “하나님의 문제”, 즉 종교적 문제로 인식한다. 그러나 라가츠가 사회 문제를 프롤레타리아와의 연대적 삶과 그들을 위한 투쟁을 통해서 해결한다면, 쿠터는 교회 안에서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해결한다. 이런 차이는 전술적인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문제에 있다. 라가츠는 블룸하르트 아들처럼 하나님을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이 하나님을 인식해야 하는 장소와 방법을 사회 운동 속에서 찾는다. (340-341)
(3) 그리스도의 가족 공동체
-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들어오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버지됨에 대한 신앙과 그것에 근거한 인간의 절대적 거룩성과 존엄성에 근거한 윤리적 세계관을 전제한다... 라가츠는 새로운 사회 형태를 “그리스도의 가족 공동체”라고 부른다. (341)
- 라가츠는 그리스도의 가족 공동체의 원리로 “종교적 무정부주의”와 정치적(또는 사회적), 경제적 형태로 “연방주의”를 가정한다. 종교적 무정부주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방해하는 신학주의, 교회주의, 성직주의, 국가주의는 파괴된다... 연방주의는 종교적 무정부주의에서 생겨난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의 형태이다. 그것은 조합적 무정부주의에서 생겨난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의 형태이다. 그것은 조합적 공동체의 형태로서 세계 공동체의 토대가 된다. (342)
- 라가츠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속에서 이 새로운 사회가 반드시 도래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그리스도의 가족 공동체를 절대적 희망인 하나님 나라에 근거한 상대적 희망이라고 강조한다. (342-343)
5. 나가는 말
-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근거해서 폭력과 맘몬이 지배하는 사회와 세속화된 교회를 개혁하려는 새로운 종교적-사회적 개혁운동이다. 라가츠는 교회의 세속화의 원인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상실로, 사회 문제를 하나님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 극복을 위해 하나님과 그의 나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적-사회적 운동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로 돌아가는 후퇴 운동과 그것에 근거해서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려는 전진 운동이다. (343)
- 역사의 대전환기에 직면한 오늘날 한국 교회와 신학의 시급한 과제는 세상의 무신성과 교회의 세속화를 극복하는 일이다.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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