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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모(1987). 신학사상 제57집, 473-504.
-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선한 행동의 업적도 자라난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한 행동을 향해 발전해가기 때문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영생의 은혜로운 약속에 대한 개인적인 개념만을 뜻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동시에 종합적이요 사회적 정치적 삶의 전반적인 변혁을 위한 결단을 뜻한다.”
1. 바르트의 라가츠 비판
- 칼 바르트는 “종교사회주의자들”의 개념을 두들겨 부수고 종교사회주의자들의 사고와 결정적으로 결별했는가? 바르트 생애에 대한 면밀한 연구에 따르면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바르트의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 생애를 통하여 종교사회주의적 사고 및 행태와 접촉하고 대화하는 인연을 갖고” 있었다. [473]
- 1911~1921까지 바르트의 자펜빌 시절은 흔히 “바르트 사상에 있어서 종교사회적 단계”라 일컬어진다. 이 기간에(1911~1919) 바르트는 자펜빌 공업지역 목사로서 헤르만 쿠터와 레온하르트 라가츠가 이끄는 “종교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복음은 하느님 앞에서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 있지 않고, 세계의 변혁, 세계혁명을 위해 있다”는 종교사회주의의 신앙고백에 대해 당시 바르트는 동의했다. 또한 그는 종교사회주의의 주요 주제인 “설교와 정치”의 변증법적 連繫(연계)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였다. (474)
- 1917년 여름 바르트는 “노동조합 결성”에 동참했다. 이로 인해 그는 공장주들의 “최악의 적” 또는 “빨갱이 목사”로 간주되었다. 자펜빌 시절 바르트는 노동자와 공장주들 간의 계급 투쟁의 실상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 갈등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예수가 어디에 서 있는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문제삼았다. (474-475)
- 단네만은 바르트가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운동에서 “자신이 제기한 의문을 푸는 장치”를 발견했다고 본다 : “칼 바르트는 레온하르트 라가츠에게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실상과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현실적인 갈등 속에서 확증된다는 점을 배웠다. 라가츠에게서 바르트는 사회를 분석하는 힘과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사회주의적 사회분석 능력을 얻어냈다 : 사회적 참상은 일련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실상과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에 의해 사회는 가진 자와 착취당하는 자로 균열된다. 자본주의는 ‘먹고 살려는 싸움’이고 ‘강자들’의 지배를 뜻한다. 라가츠에게서 바르트는 자본주의와 폭력이 짝해 있고, 이 자본주의는 군국주의와 전쟁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바르트에게 이상과 같은 사회 분석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었다. 라가츠에게서 바르트는 이밖에도 (민주) 사회주의적 사회질서에 대한 실제가 그리스도교 윤리와 많은 접촉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475)
- 다시 말해서 단네만에 의해 “바르트는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 종교사회주의자들과 전적으로 일치되고 있음”이 기본적으로 확증되고 있다. F.W. 마르크바르트도 이에 공감한다. 그는 “전적 실천”과 관련하여 바르트는 쿠터에 반대하면서 라가츠에 동의한다. (475)
- 의심할 여지없이 바르트는 종교사회주의자였다. 그는 1916년 루트나이젠과 함께 “종교사회주의 협의회의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475)
- 그러나 바르트는 사회윤리적 문제제기에 있어서 보다 명백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사회적인 갈등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디에 현존하는가?” 이 질문이 결국 라가츠와 결별하는 가슴아픈 결과를 낳았다. 라가츠와 바르트간의 최초의 긴장은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결에서 비롯되었다. 1916년 여름, 바르트는 불룸하르트의 “가정예배서”에 대한 서평을 『새 길』(라가츠가 창간한 월간, 스위스 종교사회주의 운동기관지) 편집자에게 보냈다. 이 서평에서 바르트는 “하느님의 행동에 대한 조용한 기다림”을 중요시했다 : “…… 행동에서보다 가정예배가 우리의 과제 – 우리의 희망을 위해 현실적으로 보다 유효하다. 우리의 변증은 종점에 다달았다. 우리가 건전하고 강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어린아이처럼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새삼스럽고 유별나게 행동할 것이 아니라, 조용히 하느님의 행동을 기다려야만 한다.” (476)
- 이는 사실상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운동에 대한 간접적 공격이었다. 라가츠는 바르트의 불룸하르트 이해가 “너무 협소하다”고 판단하고 바르트에게 회답을 보냈다. : “불룸하르트의 설교와 태도는 엄청난 투쟁과 체험에서 나온 성숙하고 느긋한 열매입니다. 또한 그는 이제 노인입니다. 그의 설교와 태도는 생명과 진실의 중요한 점을 상실했습니다. 푹신한 솜방석으로 변했습니다. 자칫 소리 없는 영적 자만의 동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476)
- 라가츠는 이 서평을 “고쳐 써달라”는 요구와 함께 바르트에게 되돌려 보냈다. 열흘 뒤 라가츠는 바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블룸하르트 이해가 너무 일방적이라고 통고했다. 이로 인해 젊은 바르트는 두 말할 나위없이 상심했다. 라가츠가 바르트에게 되돌려보낸 불룸하르트 가정예배서에 대한 서평은 『스위스 자유노동자』라는 잡지에 수정없이 실려 출판되었다. 때문에 라가츠와 바르트 사이의 친교에 금이 가고 말았다.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바르트의 공격은 1919년 “베른의 G.A. 베슬린 출판사”에 의해 간행된 『로마서』 제1판에서 심화되었다. (477)
-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초판, “하느님 나라의 기준”에 관한 제1장에서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의 신학적ㆍ사회윤리적인 “독특한 자세”와 대결했다. 여기서 바르트는 종교사회주의 이념은 단지 하나의 “인간적인 의”라고 생각했다 :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상주의는 낡은 세계 안에 있는 새 것이 아니다. 교회와 선교, 개인적인 굳센 의지와 도덕성, 평화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등은 하느님 나라를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낡은 인간 왕국을 대신한다. 만족스러운 (그 나라의) 소유자는 있을 수 없다. 신앙의 계명과 나란히 어떤 형태의 전제도 허락할 수 없다.” (477)
- “하느님은 어떠한 할인판매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르트의 견해다. (477)
- 바르트에 의하면 (할인판매와 같은) 그러한 인간적 행동은 “하느님에 대한 반항”이다. 이런 이유로, 이름을 들먹이지 않지만, 두 말할 나위없이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적 실천에 표적을 맞춘 바르트의 비판은 계속된다 : “세계의 발전적 진행데 대항하여 던지는 비판과 저항, 하느님을 향한 회개에의 부름과 방향지시 등은 모두 세계내적(世界內的)이다. 이들은 필요성에서 나온다. 구원자로부터가 아니다. 이런 류의 빛은 한밤의 까물거리는 빛이다. 해돋이도 아니고 동이트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강물 한가운데서 활동했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이 강물 위에서 모든 인간적 행동은 표류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한다. 이들 속성의 결정적 배후는 또한 실제에 있어서 돌아가는 세상 형편에 대한 동의이고 지원군이다. 자신의 전제와의 담합이고, 자기류의 방식과 본성에 대한 연대이다. 이는 그만큼 더 사악한 것이다. 이들은 결국 ‘하느님’과 함께 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478)
- 라가츠는 단호하게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하느님과의) 공동투쟁”, 즉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투쟁”을 강조한다. 이와는 달리 바르트는 계시의 주체로서의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 “역사는…결단코 계시의 본질이 아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자신을 주체로서 계시한다.” 바르트도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쟁”을 지지한다. 또한 종교사회주의적 노동운동에 대한 終末論적 희망을 긍정한다. 동시에 그는 “하느님의 실천”을 “인간의 실천”과 동일시 내지는 혼합하는 위험을 직시한다. 바르트는 인간의 타락을 바로 “이념을 위한” 타협으로 동일시한다. “그러한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어떠한 추상적인 도덕이 설교될 수 없다. 어떠한 새로운 文化도 추천될 수 없다.” (478-479)
- 라가츠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종교사회주의적 실천방식과의 대결에서 바르트는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 라가츠가 하느님의 계시를 인간적인 것과, 하느님의 의를 인간의 의와 뒤섞어놓는 것은 아닌지, 그가 하느님의 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성서적 使信을 이념화하지 않는지. 이점이 라가츠에 대한 바르트 “비판의 핵심”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주제를 인간의 종교적-도덕적 의로 이념화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 될 뿐이다. 이점에서 단네만에 의하면 왜 바르트가 “종교사회주의의 사고에서” 멀어져 갔는가 하는 진의가 드러난다. (479)
- 결국 하느님 나라를 “이념화”했다는 라가츠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이 정당한가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점에 대해 라가츠에 정통한 이들은 회의적이다. 마트뮬러(사학자, 라가츠 연구가, 스위스 바젤대학 역사철학부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 “하느님 나라에서의 인간의 공동투쟁에 대한 라가츠의 주장”은 “하느님의 사신을 이념화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아주 강력한 행동”이고 “세계사적 문제에 대한 연대”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호네커도 동의한다. (479)
- 어쩌면 라가츠에게 있어서 바르트의 신학이 라가츠의 생애중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은 “가장 심한 도전”이었다 : “바르트, 로마서 주석 ; 이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있었던 나에 대한 공격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공격이) 핵심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공격은) 구터에게서 영감을 받았지만, 블룸하르트를 오용하고 있다. 악의와 증오와 교만으로 꽉 차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중요하고 깊은 면을 지니고 있다. 슬프게도 나는 최선을 다하면서 항상 지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는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이 사실을 그분(하느님)은 알고 있고 내가 원한을 갖는 것을 그분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심장을 겨눈 엄청난 충격이 나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회복될 것이다.” (479-480)
- 자신의 자서전에서 라가츠는 그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이 “부정확”했지만 그를 슬프게 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 “하느님에 대한 경외라는 증오에 차 있고 진실하지 못한 로마서 주석은 종교사회주의 운동과 특히 나의 인격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이 책은 대 성공, 일시적인 효과가 나타났다……또한 어려운 시련이 시작되었다.” (480)
- 바르트의 문제제기와 비판에 대해 라가츠는 “종교적 혁명”에 관한 자신의 논문에서 대답했다. 여기서 그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이념화했다는 바르트의 질책과 대결했다. “이제 곧 몇몇 말사냥꾼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 참으로, 이제 이상주의가 하느님과 그의 나라를 대신할 것이라고 말할 것 없이, 이미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이래 둘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는 법을 알고 있다. 이상주의가 무엇인지 배울 필요는 없다. 이상주의는 이미 최상의 전단계요 聖地를 향한 현관이 되었다. 이러한 것으로서 어거스틴도 빠스칼도, 키에르케로르도 톨스토이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잘못된 이상주의가 있다. - 어떤 누구도 우리처럼 이에 대해 도전할 일이 없었다. 최상의 위치에 앉아보려는 이상주의가 있다. - 이와 같은 이상주의는 아마도 최상의 것에 방해가 될 것이다 : 그러나 세계로부터 靈을 추방하는 것에서(세계에 대해) 영을 불어넣는 방향전환, 탈정신화에서 정신을 불어넣는 방향전화은 어느 경우이든 하느님을 향해 가는 진지하고도 필요불가결한 걸음이 된다. 플라톤과 칸트가 어느정도 중요시되는 한 이상주의라는 말도 이상주의라는 사실도, 잘 알려진 신학자들의 우월감을 갖는 우쭐됨에도 불구하고,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르트의 행태를 신학적 반동적 시기의 결과”라고 성격화했다. “령들은 투쟁과 유랑에 지쳐 있다. 또한 이 영들은 하느님 나라 사신에 대한 요구가 있다는 소리를 더 이상 옳게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의 세계변혁의 능력에 관한 통고는 그들에게 주변적이고 해로운 것이 된다. 그 능력에 반하여 이미 피곤해진 심령들의 하느님으로부터의 일탈, 그들의 타락, 그리고 그들의 죄상이 굳어지고 있다. 이 피곤한 심령들은 이같이 찟기고 저주받은 세계로부터 일종의 종교적 피난처로 피신하게 된다. 까닭에 그들에겐 단순한 종교적 도식을 제공하는 형식주의가 정당화된다. 이 단순한 종교적 도식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다. 또한 이 형식주의는 아주 천박한 저항의 노선을 따르게 된다…동시에 우리는 모험적이고 반동적이고 이교적이고 또한 아주 안이하고 천진하고 公的일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지친 심령들은 정치-사회적인 분야에서의 반동행위과 같은 필요한 역할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 없이는 종교적 혁명이 일방적인 전진, 돌격에서 진실의 큰 부분을 간과하게 되는 사태가 빚어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자신의 저항을 통하여 그와 같은 반동들을 방어해야만 한다.” (480)
- 라가츠는 바르트의 로마서 초판에서 위험스러운 쿠터식 전형의 징조를 보았다 : “오직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오직 그분의 말씀 안에 있는 계시로부터”, 즉 세계 없이 하느님만이라는. (481)
- 1919년 가을 독일 탐바하에서 열린 종교사회주의 협의회에서 바르트는 “社會 속의 그리스도”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열린 이 첫 종교사회주의 협의회에 라가츠가 연사로 초빙되었지만 와병으로 그는 본회의 참석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를 대신하여 바르트는 라가츠가 하려던 강연을 대신했다.] 이 강연에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계시”를 핵심 주제로 설정하고 당시 여러 종교사회주의적 경향을 “소위 덜된 그리스도”라고 매도했다 : “어디에서 하느님의 세계는 우리의 사회적 삶에 반하는 개방된 창을 갖는가? 어떻게 우리는 마치 하느님의 세계가 그 창을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에 이르는가? 그렇다, 언젠가 한번 그리스도가 세속화 되는 것,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사회민주당, 평화주의 그리고 철새(1901년 독일에서 설립된 도보여행장려운동)를 위해, 지난날의 조국을 위해, 스위스 국가와 독일 국가, 또는 조직화된 자유주의를 우해 했던 것처럼 무엇인가를 위해 행동한다는 것, 이것이 경우에 따라선 잘 돼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하여 우리는 두려움을 갖는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배신할 생각은 없다.” (481-482)
- 이 강연에서 바르트가 강조하려 했던 것은 “복음을 세속적 운동으로 속화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모든 세속화, 모든 류의 일방적인 적용에 대해 저항하는 하느님의 절대성”이었다. 이 바르트의 강연은 아래와 같은 문제를 안고 끝맺었다 : “우리는 명백히 오직 한가지 일만 할 수 있다. 여러 일이 아니다. 그 한가지 일을 우리는 지금 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이 사회에서 하느님의 행동을 주의 깊게 따라가는 일 외에 무슨 엉뚱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482)
- 유감스럽게도 바르트의 강연을 들은 많은 청중들은 그 강의에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요구”를 탐지했다 :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라”는. (482)
- 탐바하 협의회에 관련하여 라가츠는 후일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전하고 있다 : “많은 독일 사람들이 바르트의 강연을 통하여 처음으로 우리 종교사회주의의 주요 내용을 알게 되었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내용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하고 또 왜곡했다. 이로 인해 종교사회주의 주제의 혁명적 요소가 마비되었다.” (482)
- “탐바하 협의회 이후 칼 바르트와 그의 가까운 동료들, 그리고 스위스 종교사회주의 운동들 간의 길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고 마트뮬러는 평가한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 탐바하 협의회 이우 “신학과 예언, 교회주의와 평신도운동, 학문적 연구와 정치적 투쟁, 학자적 임무와 主知主義의 거부”가 결과적으로 “싸우는 형세”가 되었다.] 여기서 바르트는 다른 “급행열차”를 갈아탔던 것이다 : “나와 라가츠는 두 대의 급행열차처럼 서로 통과하여 지나쳐 갔다 : 그(라가츠)는 교회 밖으로 나갔고 나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 이같이 바르트는 자신과 라가츠의 서로 다른 교회 이해와 관련하여 종교사회주의와 결별한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종교사회주의자들”의 구상을 깨뜨렸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내가 참으로 그와 같이 해석된다면, 이미 1919년 레온아르트 라가츠에 의해 의심할 수 없이 실증되었던 것과 같이 독일종교사회주의의 구상을 그렇게 철저하게 깨뜨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483)
- 왜 바르트가 “종교사회주의 사고”에서 멀어져 갔을까? 이 문제에 대해 단네만은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 첫째, “하느님의 행동에 근거한 보편타당한, (하느님 나라에 대해) 긍정적인 목표설정을 지향하는 정치적 실천에 대한 바르트의 추구는 막다른 골목에서 끝장이 났음”을 초기 바르트의 신학적 발전은 보여준다. 둘째, “그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 철저하게 혁명적인 행동은 철저하게 사회 밖에 있는 주체, 즉 하느님 자신의 혁명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기대된다. 하느님은 사회를 변혁하고 갱신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주체이다…… ‘하느님의 혁명’의 철저성에 대한 바르트의 강조는 神的 행동의 독자성에 관한 주제로 이행한다. 이 독자성은 모든 신적인 행동과 인간적인 행동의 긍정적인 일치, 즉 ‘하느님의 혁명’을 위한 인간의 모든 적극적인 관여를 배제한다. 바르트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호하게 대립적으로 설명하는 한, 그는 종교사회주의와의 교제를 끊게 된다.” 셋째, “종교사회주의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쟁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인간은 이 투쟁에서 능동적인, 즉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는 데서 출범했다.” 이에 반하여 “‘하느님의 혁명’의 철저성에 대한 바르트의 강조”는 다음과 같은 견해에 이르게 된다 : 전정한 사회주의는 “다만 하느님의 나라 그 자체에서만 가능하다.” 로마서주석 제2판에 의하면 의롭고 사회주의적 사회질서를 위한 능동적인 투쟁이란 있을 수 없고, 단지 모든 형태의 사회적 억압에 항거하는 영원한 저항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방식의 저항이 인간의 모든 정치적 실천의 목적이다. (483-484)
-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 칼 바르트는 종교사회주의의 사고에서 결정적으로 떠났는가?
2. 라가츠의 바르트 비판
- 바르트의 라가츠 비판이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적인 행동,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과 하느님 나라 사신의 사회적-정치적 시련, 그리고 하느님과 의와 인간의 의를 혼합하는 위험성을 겨냥했다면 바르트에 대한 라가츠의 반격은 그 둘 사이를 분리하는 위험성에 표적을 맞추었다. (484)
- 헤르만 쿠터가 말하는 “하느님으로부터”와 “하느님을 향해서” 사이의 날카로운 분리에 대한 라가츠의 비판은 동시에 바르트에게도 해당된다. (484)
- 바르트의 신학적 사고방식에서 라가츠는 의심할 나위 없이 “쿠터 신학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았고 또한 바르트는 “모든 면에서 쿠터의 충실한 무하생”이라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결국 ‘하느님으로부터’의 노선으로” 선회했다는 것이며 “신학적 이론의 사회적 실천”은 이에 따라 그에게 있어서 “희생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484)
- 라가츠는 바르트에게 “지상적인 것과 초지상적인 사건의 전적인 분리”, 즉 “세계는 세계이고, 신은 신”이라는 바르트의 주제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바르트의 경향은 블룸하르트에 대한 일방적인 해석에서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 라가츠의 견해였다. (485)
- “이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우리의 견해와 전혀 다른 이 문제가 바로 다음의 사실, 즉 지상적인 발전과 초지상적인 발전간의 관계에 대한 블룸하르트의 이해를 밝히 보여준다. 이 점에 관하여 하찮은 이들과의 대화가 아니라 블룸하르트 부자와 나를 몹시 괴롭혔던 대화를 한 바 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행동을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 점성술과 일치시키려 했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블룸하르트의 개인적인 태도와 연결되거나 두 말할 나위없이 敎條的(교조적) 주제의 일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485)
- “지상적인 사건과 초지상적인 사건을 전적으로 분리하는 경향” : 여기서 리히는 근본적으로, 라가츠가 “변증법적 신학의 핵심 인물에 대해 비판”을 퍼부어댄 이유를 본다. 그와 같은 경향은 라가츠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숨길 수 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이에 관하여 그는 1918년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초판이 출판되기 전 그의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
- “드디어 우리는 단지 하나의 새로 포장된 교회주의를 얻은 결과로 맞았다. ‘종교-사회주의적 돌팔이 성직자들’이 자주 종교사회주의자가 아닌 다른 이들보다도 참으로 더 불쾌하다. 이는 일반적으로 신학자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들에겐 종교가 너무 지나치게 수공업이거나 스포츠가 되거나 (단순한) 말과 思考로 변한다!” (485-486)
- 바르트의 로마서주석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 라가츠는 “이 로마서주석의 중심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바르트의 로마서주석에서 “정치-사회적 영역에 대한 反動 행위”를 보았다. 이어서 그는 바르트의 비판적 질의에 대한 반격을 제시했다. 이레 관하여 라가츠는 종교적 투쟁에 관한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저항을 통한 그와같은 반동행위를 자행할 경우 “막힌 물결이 둑을 무너뜨리고 세차게 계속 돌진해 갈 것이다. 이 물결은 그것 자체 안에서, 즉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의 권위를 갖는 自由에 거역하고, 그리스도에게 거역하고 또한 전체 하느님의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한 마음을 준비시키는 일이 되고, 아울러 저항을 돕게 된다. 나아가서 이 반동행위는 이제 효과적인 방식으로 혁명을 불러 일으킨다.” (486)
- 라가츠의 비판적인 관찰에 의하면 이 반동행위는 “하느님의 나라와 주를 따름, 그리고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표제로부터, ‘오직 믿음에 의한 認義’의 교리로의 이탈이고……그리스도의 혁명으로부터 반동적 그리스도교를 향한 이탈이다.” “하느님의 요구와 약속을 지닌 이땅을 위한 하느님의 나라”로부터 “오직 믿음에 의한 認義” 교리에로 이탈하는 길은 라가츠에 의하면 “모든 비판주의와 개인구원론”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가츠에 의하면 변증법적 신학은 “부르주와 계급의 반동행위의 주된 저항”이다. 이 신학이 모든 행동하는 거인주의에 반대, 격분하고 주를 따름을 경멸하는 변증법적 신학에 있어서 행동한다는 것은 하찮은 것, “단지 하나의 신학적으로 정리된 부르주와적 편협성일 뿐”이다. (486-487)
- 마침내 변증법적 신학에 대한 라가츠의 비판은 이 신학의 “神學化” 내지는 “교리적 체계화”를 겨냥했다. 그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에서 “복음을 신학적 양식으로 무감각하게 만들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교리적으로 체계화하는 점을 보았다. 전적인 체념을 보았다.” 라가츠에 의하면 그러한 위험한 경향은 “모든 윤리적 행동의 상대화”로 나아간다. 까닭에 바르트에 대한 라가츠의 비판은 윤리적 역동성을 상대화하는 점을 겨냥했다 : “이러한 상대화는 물론 또한 변증법적 신학의 사회주의 이해와 관련을 갖는다. 이 새로운 신학은 복음과 사회주의 사이에 하나의 아주 넓은 심연을 만들고 있다. 이 신학은 종교사회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종교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아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고, 실로 종교사회주의자들이 놀랍게도 사회주의와 하느님 나라를 혼동한다고.” (487)
- 라가츠에 의하면 변증법적 신학은 “사실” 대신 “종교적 행위”를 다시 절대화하고 윤리를 거절한다. 중요한 것은 라가츠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점이다 :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복음을 삶으로부터 신학으로, 교리체계론 또한 교리고백”으로 갈라놓는다. “사회윤리적 중요 요점의 상대화” : 이 점이 변증법적 신학에 대한 라가츠의 공격 표적이었다. (487)
- 이제 라가츠는 바르트 신학의 교회 이해와 관련하여,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교회주의”의 재구성이 문제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라가츠에게 있어서는 “하느님 나라의 발전은 땅과” 관계되고 “현시대(現時代) 안에서의 그 나라의 실제적인 승리”와 관계된다. 단연코 “신학화 하는 일”이나 (체계화로서의) “교회”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변증법적 신학은, 라가츠의 비판적 관찰에 의하면, “새로운 교회주의를 뒷받침하는 버팀목”의 하나라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변증법적 신학자의 퇴거”이고 “(체계적) 교회에로의 퇴거”를 의미한다. 여기서 그는 “神政論的 요소의 결핍, 전 삶을 통치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요구에 대한 결핍”을 보았다. (487-488)
- 라가츠는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현실을 분리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바르트와의 대결에서 라가츠는, 그와같은 분리가 “변증법적 신학의 근본적인 잘못”이라고 보았다. 라가츠에 의하면 하느님의 “말씀과 현실”은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신학은 이 양자간의 결속을 다시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 변증법적 신학은 “말씀을 궤도로 정하고 현실을 엉뚱한 데에 넘겨주었다. 이 신학의 오류는 하나의 잘못된 태도전환에 있다. ……이 신학은 생동하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주제를 벗어버리고 신학이라는 궤도로 방향을 바꾸었다. 때문에 변증법적 신학은 또한 신학(化)을 의미한다. 이름 그 자체 안에 벌써 비판이 들어 있다 : 하느님의 나라 대신 신학!”이라는. (488)
- 탐바하 강연에서 바르트는 다음의 사실을 강조했다. “하느님이 문제되고, 하느님으로부터의 운동이 문제된다는 사실, 종교가 아닌, 그분을 통하여 운동하는 우리의 존재가 문제된다는 사실……소위 ‘종교적 경험’은 철두철미 부수적이고 2차적인, 그리고 파괴된 신학의 형태이다.” (488)
- 두말할 나위없이 바르트는 여기서, “진실로 神的인 입장을 받아들이는 헤겔과 트렐취에 대항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仲裁(중재)”를 거부했다. (489)
- 여기서 라가츠는 “하느님과 세계,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인식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를 보았다. (489)
- 라가츠는 바르트가 하느님의 현실로부터 그의 말씀을 예리하게 분리하는 것을 “현실로부터의 이탈”이라고 성격화했다. 라가츠에 의하면 이는 변증법적 신학에 있어서 “하느님의 현실로부터의 이탈”을 뜻한다. 이점에서 바르트에 대한 라가츠의 비판은 “단지 형식에서만이 아니고, 변증법적 신학의 내용에 대해서도” 파고든다. 물론 그의 긍정적인 면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 “나는 또한 바르트 및 그의 동료들과 다음의 사실에 대해 아주 일치한다. 즉 모든 문화의 본질과 모든 세계의 본질-종교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되는 데-에 反하여 요컨대 하느님의 주권을 새롭게 선포한다는 것이 유효하다는 점. 이 점에 대해서는 매우 강력하게 동조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489)
- 이와 관련하여 그러나 라가츠는,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영광의 이름으로 우상의 세력들과의 투쟁과 어떻게 다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대답에 의하면 전체 성서적 사신의 최동적인 말, 기본적인 의미는 “세계 위에 계신 하느님이 세상 속으로 개입한다는 것”이다. “역사 속으로, 인간의 본질 속으로 들어오시고, 거기서 행동하시고, 또한 인간이 되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고백한다면 하느님은 라가츠에게 있어서 “주님으로써 동시에 가까이 계시는 분”이다 : (489)
- “그분이 또한 주님이 아니라면,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일 수가 없을 것이다 ; 그분이 우리 위에 계시지 않는다면, 이 세계, 우리와 다르지 않으시다면, 창조주와 구원자가 아니시라면, 그는 우리를 도울 수도 구원할 수도 없을 것이다 ; 그분이 주님이 아니라면, 우리의 아버지일 수가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분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은 그가 우리의 아버지라는 데서 좌우된다.” (490)
- 이 점에서 라가츠는 바르트의 하느님과 세계에 대한 분리는 “모든 중요한 신학적 變造(변조)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실례로 라가츠는 종말론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를 들었다. 라가츠에 의하면 변증법적 신학은 “종말론적 비관주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신학은 “죄의 권세가 모든 인간 본질을 지배한다는 점에 깊게 물들어 있다.” (490)
- 마침내 라가츠는 악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를 비판했다. 라가츠는 “변증법적 신학에 있어서 악의 存在가 상당히 靜的(정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라가츠에 의하면 악은 “아담의 죄”, 즉 지금 다시 하느님과 세계가 분리되는 균열을 뜻한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에 있어서 악의 그와 같은 (하느님과 세계의 분리라는) 고정화가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악의 본체가 보존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라가츠는 의문을 제기했다. 라가츠에 있어서 악은 “추상적인 데서는 현실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단지 구체적인 데에서만” 파악된다. 정치ㆍ사회적 악에 대한 바르트의 행태(行態)와 관련하여 라가츠는 1927년 그의 친구 루돌프 리히텐한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 (490)
- “나는 나 자신이 전쟁과 사회적인 不義에 반대하여 싸우고 있다고 자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나는 단호하게 의무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하려는’ 욕구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또한 내가 더 이상 독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바르트가 하느님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강의 강단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그가 행동하는 것 이상이요 하느님 자신이 위임함직한 것 이상을 뜻한다. 하느님은 신학자들(최고위 신학자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없이 하실 일을 아시는 분이시다. 이 밖에도, 당신이 나를 알고 있듯이, 나는 다음의 사실을 알기 위하여 정말로 충분하게 신학적이다. 즉 나는 또한 바르트의 무리들이 변호하고 있는 진리들을 철두철미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변호했다는 사실.” (491)
- 특히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초판에 대한 라가츠의 강력한 비판은 참으로 바르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우리의 동지 라가츠의 비판의 소리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말해야 된단 말인가? 그가 지휘한 것이 분명한 이 무시무시한 ‘공격’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아직도 여전히 로마서주석 초판을 겨냥하고 있는가? 그동안 나는 그를 정말이지 할 수 있는 데까지 조용히 내버려 두었었다. 그렇지 않은가?” (491)
- 라가츠 역시 바르트 및 변증법적 신학자들과의 결별을 “자주 슬프게” 느꼈다. 라가츠와 바르트가 진실로 “두 급행열차처럼” 서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말았던가 하는 문제가 여기서 제기된다. (491)
3. 하느님 나라를 향한 공동의 행군
-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운동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1927년 바드 라우터바하에서 열린 한 협의회에서 투르나이젠은 종교사회주의운동은 “하느님의 현실을”, 변증법적 신학은 “하느님의 말씀”을 변호한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말씀의 선포와 현실의 도구, 실천적인 行態와 하느님의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투르나이젠에 있어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말씀과 현실”은 서로 관련을 갖는다 : (491-492)
- “이러한 두 가지 관심사의 상호이해에서 우리 시대의 진보적인 운동이-이 운동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한-발생할 것이 분명하다. 이 양자의 관심사는 둘 다 없어서는 곤란하다. 한편이 다른 한편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우리는 끔찍한 위험, 空轉(공전)의 위험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위험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갖고 있고 이를 갖기를 원하는 곳에서 생기는데, 이는 진정 생명을 다하여,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생명의 필연으로부터 치솟아오르는 욕구,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바로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종교사회주의가 우리 시대에 우리의 마음에 이와같은 관심사를 불러 일으켜 놓았다는 데서 나는 종교사회주의의 영속적인 가치를 본다. ……분명히 이는(말씀과 현실) 두 가지(서로 다른) 관심사이다. 그러나 이는 양면을 포괄하고 있는 한 장의 종이다.” (492)
- 중요한 것은 “라가츠와 바르트의 유사성”이 정치ㆍ사회적인 참여 사회주의, 특별히 사회민주당과의 관계에서 밝혀진다는 점이다. 라가츠에 있어서 사회주의는 “참된 신앙”, 즉 “상대적 희망”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사회주의에 대해 “실천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바르트에 있어서 “하느님과 교회적 실천에 대한 질문은 바로 교회의 사회적ㆍ정치적 실천에 대한 질문과 연관된다.” 단데만은 아래와 같이 논증한다. 바르트에 있어서 “神認議과 社會認識, ‘사실을 추구하는 말씀’과 ‘상황을 추구하는 말씀’”은 서로 관련이 있다. 이러한 근거에서 바르트는 자펜빌 시절만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사회주의에 대해 “실천적 관심”을 가졌다. 이점은 그 자신의 사회ㆍ정치적인 事記가 밝혀준다. (492-493)
-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마르크바르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 : “바르트는 ‘하느님으로부터’라는 쿠터의 사고구조를 ‘하나님을 향하여’라는 라가츠의 思考와 결합했던 것 같다. ……바르트는 자신의 종교사회주의와의 관계에서 실천적인 면에서는 라가츠와, 이론적으로는 쿠터와 연계되어 있다.” (493)
- 바르트는 의심할 나위없이 종교사회주의와 대화하는 입장에 있었다. 동시에 그는 (여기에서) 어떻게 그가 당시의 정치ㆍ사회적인 문제에 대답해야만 하는가 하는 점을 배웠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라가츠의 제자”였다. G. 자우터가 이와 비슷한 의견을 말한다 : “라가츠는 그가 ‘정력적으로 문제를 파악하는 것’을 통하여 바르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493-494)
- 라가츠와 바르트는 실체적이고 실천적인 관심을 공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하느님 이해에 따른 차이점이 있다. 이점을 헤르켄라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바르트의 사회주의 이해의 배경에는 라가츠의 배경에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하느님이 서 있다. 변증법적 신학의 전문적 용어로 우리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신성이라는 관점으로써, 라그츠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인간성이라는 관점으로써 말할 수 있겠다.” (494)
- 신학적ㆍ사회윤리적 思考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신학자 라가츠와 바르트는 성서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 성서가 있는 곳에 그들의 신학이 現在한다. “이 책(성서)이 현존한다!” 여기에서 그들의 신학이 시작된다. 자신의 성서 연구 서문에서 라가츠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이 시도의 직접적인 성과가 어떤 것이고 이 성과가 얼마나 클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쓰고 있는 사람은 그에 관하여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크게 느껴지는 것은, ‘이 책이 현존한다!’는 사실, ‘성서를 이해하는 본질적인 것이 진술된다!는 사실, 이 점이 무시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감사한다. 또한 하느님이 저자에게 노년기에 그분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려는 이 작업을 위해 여전히 시간과 힘을 주신 데 대하여 전적으로 감사한다.” (494)
- 바르트에게서 우리는 같은 목소리를 듣는다. 로마서주석 초판 서문에서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 “이 책”을 기다릴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블룸하르트운동의 통일성”만이 아니라, 칼빈의 개혁교적 공통의 유산을 보게 된다. (494-495)
- “하느님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으셨으니 아무도 이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고전 3, 11) : 그리스도교 신학은 오늘날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기초”를 다시 놓을 수 없다.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라가츠와 바르트 신학은 그리스도론 중심의 신학으로 성격화할 수 있다. 라가츠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위대한, 갈 길을 보여주시는 분”이고 “항상 새로운 분”인 동시에 “미래를 가져다주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실로 라가츠 신학의 “핵심이고 의미”가 된다. 이에 관하여 그는 알프레드 블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그리스도, 그분의 나라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현실, 모든 만물의 주로서의 그리스도, 이 점이 내가 바라고 믿는 모든 것의 핵심이고 의미이다. ……그리스도 현실에 대한 한 부분이 나의 사회적인 희망이요, 보다 깊은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이를 간청, 탄원하는 것이 나의 진실중의 진실이다.” (495)
- 바르트는 의식적으로 “‘그리스도론 중심’의 길”을 내딛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모든 神認識의 試金石이요, 모든 신학의 시금석이다. 바르트의 그리스도론 중심의 경향은 그가 불트만에게 보낸 1952년 12월 24일자 편지에서 밝히 드러나 있다 : “보다 큰 거부와 분노에 대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찌됐든 당신에게 단지 한 가지 사실만을 시사하는 모험을 감행하려고 합니다. 그 한가지 사실이란 내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점점 더 진첸도르프(경건주의자)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점점 더 신약성서 안의 근본적으로, 바로 중심이 되는 그분에게만-모든 것이 중심되는 이분의 빛과 표시안에서만 드러나는 데-몰두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495-496)
- “그리스도론 중심”과 관련하여 우리는 바르멘 선언을 회상한다 :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하고, 살든지 죽든지 이 말씀을 신뢰해야 하고 이 말씀에만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선포의 원천으로서 유일한 하느님의 말씀 주위에 하느님의 계시가 아닌 또 다른 사건이나 권세, 형식이나 진리 등속을 허용할 수 있다거나 허용해야만 한다는 거짓 가르침을 거부한다.” (496)
- 바르멘 선언 첫 번째 주제는 “만물의 주로서의 그리스도”, “하느님 나라의 가장 깊은 근거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라가츠의 주제와 바로 관련을 갖는다. 라가츠와 바르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신학의 근거요 목표이다. 그 둘은 의심할 나위없이 그리스도론 중심의 신학자로 성격화된다. 두 신학자의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언제나 “집어치울 수 없는 핵”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이 문제되었다. (496-497)
- 라가츠와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느님 나라 이해가 그들 신학의 출구가 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이의 실천에 대하여 그 둘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497)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에게 있어서 라가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하느님 나라의 “방향과 선”이 문제된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하느님을 향해 있는 역사의 추세 안에서의 역사의 현실에서 명백해진다. 이 점이 “성서의 핵심이자 별, 그리스도 사실”이다. 동시에 라가츠 신학의 “기본방향”이다. “역사적인 문화의 진보” 또는 “세속적 형식의 종교적인 문화재”로서의 하느님 나라 이해와는 달리 쿠터와 라가츠는 하느님 나라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철저하게 새로운 것”으로 종말론적으로 이해한다. 하느님 나라를 고백한다고 할 때 라가츠에게 있어서는 특히 “세계 내에서의 하느님의 통치”, “인간을 위한 의와 평화”가 문제되고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인간화”가 문제된다. 이런 의미에서 라가츠의 신학은 “사회윤리적”으로 이해된다. (497)
- 중요한 것은 라가츠의 사회윤리가 단순히 “현실고정”으로가 아니라, “표면상 불가능한 것”으로서, “사회적 의”로서 “하느님의 현실주의”에 방향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라가츠에게 있어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나라는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나 “윤리적 행동”에 대한 세속적 이념화가 아니다. 라가츠에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포괄적인 하느님의 통치”이다. 세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를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라가츠에게 잇어서 “선물인 동시에 과제”가 된다. 때문에 라가츠에 의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은 역사적 운동, 정치ㆍ사회적인 운동과 분리되지 않는다. (497-498)
-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는 “도래하는 새 것”이고 “새로운 세계”이다. 이 새 세계의 문턱에 우리는 새 인간으로 서 있다. (498)
- 동시에 그에 의하면 그 나라는 “방향이고 선”이다. “이 방향과 선 안에서 옛 것과 새 것의 갈등 속에서 우리는 인도함을 받는다.” 이 방식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느님 나라 이해와 관련하여 결코 “정치적인 원리”라든가 “정치적 제도”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정치적 결단을 단행해야만 하는, 분명한 방향이 문제된다.” 마찬가지로 라가츠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결정적으로 “새로운 방향설정”이 문제된다. 설계라든가 조직이라든가 체계가 문제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바르트의 가르침은 “창조로부터 하느님 나라가 아닌, 하느님 나라로부터의 창조”를 뜻한다고 마르크바르트는 정당하게 성격화하고 있다. (498-499)
- 이와 같은 하느님 나라 이해에 대한 바르트의 창조사상은 모든 주어진 것에 대한 종말론적 비판으로 이끈다. 또한 “종교사회주의적 사고방식과의 연결점”이 된다. 이 안에서 리히는 바르트의 신학적ㆍ사호윤리 이론의 초월적ㆍ종말론의 성향을 본다. 바르트의 이 이론은 쿠터의 종교사회주의의 노선인 “하느님으로부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라가츠와 바르트가 “모든 이세상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뜻하는 “하느님 나라 철저주의”를 공유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여기서 라가츠와 바르트의 하느님 나라 이해에 대한 차이점을 가볍게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쿠터의 영향에 따라 “이 세계를 초월하는 철저한 종말론적 심판으로서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절대적인 것”이 강조되었다. 이에 반해 라가츠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종교적, 정치적 및 사회적인 참여”가 강조되었다. (499-500)
-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이 강조되었다. 이와함께 그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가 이미 완성한 세계와의 화해에 대한 주권”을 생각했다. 동시에 그에게 있어서 “소위 세계사의 무대 위에서의” 정치적 결단은 “중대한 일”이다. 그러나 “가장 중대한 일은 아니다.” (500)
- 라가츠에게 있어서는 하느님 나라의 실천이 문제시되었다. 이는, 리히가 정당하게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빛에서 세계사를 주시하는 것”을 뜻하고 “역사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것”을 뜻한다. (500)
- 또한 라가츠는 근본적으로 “믿음을 세계 내에서 희망하는 행동으로” 이끌어가려고 했다. (500)
- 이에 따라 라가츠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인간의 (하느님과의) 공동투쟁”에 대하여 말한다. 때문에 “그리스도교적인 실존은 오직 세계 내에서의 실존”이고, “혁명적인 실존”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것”과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서의 하느님 나라의 실천은 “하느님으로부터”로서 살아계신 하느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믿음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00)
- 라가츠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의 정통실천은 리히에 따르면 “성서의 신앙증언에서 유래되는 것”과 관련되고, 마르뮬러에 따르면 “살아계신 하느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신앙에서 나오는 삶의 의미”와 관련된다. (500-501)
- 바르트의 종말론적 “유보”에서 스넬리는 지상적 희망의 창조적인 폐기를 본다. 그러나 바르트의 초월적ㆍ종말론적 성향은 부스케스에 의하면 “일정한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정치적 반동의 사실”을 “하느님의 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진정한 “피안”은 “고정된 사회에서 세계를 변혁하는 하느님의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 (501)
- 다시 말해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현실은 사회공동체의 ‘현실’을 변혁한다.” : “사회공동체와 함께 하는 하느님의 역사 현실은 그의 ‘현실’을 역사적인 것으로 만든다.” : “현실 중의 현실은 하느님을 통한 현실의 운동이다.” 사회공동체의 변혁으로서의 하느님의 행동에 대한 바르트의 認識은 “하느님의 혁명”이라는 사고로 이끈다. 여기서 라가츠는 바르트가 “그리스도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종교적ㆍ사회적인 이해”를 용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501)
- 라가츠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사실은 내재적이고 또한 종말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넬리는 여기서 “행동주의의 위험성”을 본다. 스넬리에 의하면 라가츠의 역사신학적 성향이 강하게 “구체화 내지는 결단을 향하여”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한 능동적이고 대담한 라가츠의 개입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확증된다. 라가츠에게 있어서는 “세계의 구원”, 즉 “하느님으로부터 유래, 하느님을 향하는 세계의 새 창조”가 강조된다. 라가츠는 “인간의 능동성”으로서의 “하느님을 향하여”를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실로서의 “하느님으로부터”는 인간적 사실의 “기초”가 된다. 또한 그는 상대적 희망을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절대적 희망이 “상대적 희망의 기초”이다. (501-502)
- 바르트는 항상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운동과 날카롭게 대결했다. 그러나 단네만은 이렇게 생각한다. 종교사회주의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은 “종교사회주의를 자유주의 신학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데” 표적을 맞추었다. 바르트가 “종교사회주의의 지평이 너무 협소하다”고 생각했을지라도, 그는 종교사회주의를 “이와같은 비판을 가지고 송두리 채 던져버리려고 했던 것만은 아니다.” (502)
- 이제 단네만은 바르트가 “종교사회주의의 중심 주제를 종교사회주의와 적절하고 타당한 대화없이 자신의 고유한 개념으로 통합하려 시도했다”고 비판한다. 총체적으로 볼 때, 바르트의 신학적 업적에 있어서 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와의 “유사성”이 “거리감”보다 “컸다.” (502)
- 날카롭게 대결하면서 라가츠와 바르트는 그릇된 종교에 대항하여, 개신교의 문화적 자유주의신학에 대항하여, 동시대의 정치ㆍ사회적인 악, 즉 자본주의적으로 세뇌된 사회공동체와 볼쉐비키의 제국주의적 공산주의 그리고 군국주의 정신, 특히 독일의 전쟁신학에 대항하여 함께 싸웠다. 두 신학자는 건강한 신학을 위하여, 공동체로서의 그리스도 교회의 갱신을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위하여, 살아계신 하느님과 이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 투쟁했다. (502-503)
- 발터 뤼티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라가츠와 바르트 “두 사람은 그들의 출구와 최종목표에서 서로 아주 가까운 상태이다” : “믿음과 삶이 일맥상통하는 곳, 그곳, 지구의 끝에서 폭풍우가 치는 데도 불구하고 서둘러 앞서간 레온하르트 라가츠와 칼 바르트가 괴로웠던 지나간 최근 몇 년 동안에 다시 만났다. 두 분 중 연하의 분은 중심부에서 보다 전방으로 다시 이동해갔고, 연상의 분은 전방에서 보다 중심부로 다시 이동했다. 이 둘을 결합한 것이 바로 이 둘이 개혁교회 신앙을 가진 신학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503)
- 요약하면 라가츠와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행군했다. 로마드카는 서로 얽혀있는 라가츠와 바르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표현하고 있다 : “바르트의 신학은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에 대한 하나의 수정이었다. 쿠터와 라가츠의 활동에는 성서적, 교회적 삶의 해김이 너무 빨리 정치적 사회적 열정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위험이 상존했다. 그러나 또한 다른 위험-어쩌면 더욱 큰 위험이겠는데-이 있었다. 이 위험이란 바르트의 위기신학 또는 후기의 변증법적 신학이 일종의 교회주의신학의 틀로 굳어져 가고 하나의 학파가 되어간다는 점, 이 신학이 너무 강하게 체계화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신학의 신봉자들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역사 내에서의 항상 새로운 혁명을 관찰하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우리가 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쿠터와 라가츠의 강조점과 함께 바르트의 영향을 떠맡는 것이었다.” (503)
- 쌍방간의 신학적ㆍ사회윤리학적 차이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대단히 크다.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르트 신학에 대한 라가츠의 반대는 “본질적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법론에 있다. “이 방식에서 라가츠의 정치적 사회적 실천이 명백히 이해된다.” (503-504)
- 라가츠가, “우리가 온갖 신학적 체계와 온갖 교회적 기구들의 한계를 보았던 빛”이었다면 “바르트를 향해 방향이 잡힌 신학과 오늘의 종교사회주의 신학자들 간의 진정한 대화의 지향은 오늘의 신학의 새로운 갱신을 위하여, 교회의 갱신을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일이다.”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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