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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인호(2008). 중국 연변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일고찰(1945.8-1950.말). 한국사연구(140), 125-151.
I. 머리말
- 연변에서 발간된 <<한민일보>> 1945년 10월 26일자에 의하면 당시 연변 5개 현에 거주하는 조선인 수는 65만여 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연변을 떠나 한반도로 귀국... 적지 않은 만주의 오지 거주 조선인들이 연변으로 돌아왔다. 1946년 12월에 작성...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4개 현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59만여 명이었고 이는 4개 현 총인구 가운데 79~80%를 차지하였다. (125)
- 8ㆍ15해방에서 중국군이 6ㆍ25전쟁에 참전하는 1950년말 사이의 연변 조선인들의 민족정체성 문제... (125)
- 민족정체성... 중국인의 일부... 조선인의 일부... 인식의 문제... (126)
- 조국관 문제... 영토 귀속 문제... (126)
- 연변이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면 조선인의 정체성 문제는 제기될 필요조차 없을 것... 연변의 일부 조선인 지도자들이나 북한 지도자들은 연변의 북한 귀속을 원하고 때로는 중국 공산당에 요구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26)
-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몰아낸 이후 첫 번째는 국경을 확실히 하는 일이었으며 그 다음은 국경 내 소수민족의 정치ㆍ사상적 통합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126)
- 1949년 이래 중국의 민족정책은 소수민족 지역에 대해, 1) 영토 통합, 2) 정치 및 사상 통합, 3) 경제적 통합의 목표로 시행되었다. 건국 초기 신생국가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은 국토의 60%에 달하는 방대한 소수민족 지역을 영토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수평적 통합이라 할 수 있는 영토 통합이 대체로 완성된 직후에는 수직적 통합이라 할 수 있는 정치 및 사상 통합이 진행된다. 반우파투쟁 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의 시기는 중국 전체적으로는 물론, 소수 민족지역에 대해서도 사상통합이 강조된 시기였다. (126)
- 북한의 변수... (127)
- 1966년부터 10년간 지속된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연변의 문혁파들은 북한 지도층이 해방 직후 연변 조선인 사회에 끼친 영향을 과장하였던 반면, 오늘날 연변 학게에서는 북한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대체로 도외시하고 있다. (127)
- 문혁 당시 조반파ㆍ홍위병 각 단체들은 수많은 전단이나 팜플렛을 제작하였는데 거기에는 고급 정보가 많이 실려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상대 파벌이나 개인을 모략하기 위한 왜곡도니 내용도 대단히 많아 그대로 활용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127)
II. 조국관
-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해방 직후 연변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조국은 한반도였다... 실제로 해방 직후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한반도를 조국으로 생각했다. (127)
- 해방 후에도 연변의 조선인들은 조국 한반도의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128)
-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소식이 1946년 1월 초 연변에 전해진 직후, <<延邊民報>>는 신탁통치 소식에 삼천만 중국 동포가 격분하고 있다고 전하고 “해외에 있는 우리들인들 어찌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가만히 있으며 또 어찌 가만히 있게 되랴”라고 절규하였다... <<延邊民報>>는 이것이 “36년간에 응결된 우리의 뼛속 깊이 사모친 조국애”의 발로라고 하였다. (128)
- 1948년 3ㆍ1절 기념행사... 메시지에서는 “연변에 사는 백만 조선 동포는” 평화롭고 자유롭게 조선민족의 명절! 3ㆍ1운동 29주년을 기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외의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조국 조선에 하루바삐 통일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됨을 굳게 믿는다”고 축원하였다. (128)
-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가 수립되었다. 만주의 조선인 대표들이 경축 대표단(단장 朱德海)을 결성하여 북한에 방문하였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주덕해는 “북조선 방방곡곡에 휘날리는 찬란한 인민공화국 국기와 국장을 바라보며 독립적 민족으로서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게 된 광영을 깊이 감사하는 동시에 국장과 국기를 우리 해외 동포들도 힘껏 지지 옹호하여 우리 민족의 혁명적 전통과 영광을 영원히 빛나게 할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129)
- 한반도 조국관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특히 6ㆍ25전쟁 때, 그 가운데서도 중국군이 참전한 직후 한반도 조국관은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다. 중국군의 참전 개시(1950.10) 후 연변에서 개최된 군중대회에서는 “조국이 부르는 길, 힘차게 달려”가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29)
- 중국인 지도자들도 중국 조선인의 조국은 한반도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1946년 7월 10일 상오 10시 合江省 佳木斯(가목사) 시내 조선인 기독교회당에서 조선독립동맹 합강성 제1차 맹원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내빈으로 중국공산당 중앙동북국 위원으로 북만주 합강성 혁명을 책임지고 있던 張聞天(장문천)이 참석하여 격려하였다. 장문천은 중국 정세를 분석하였다. 국민당은 반동적 독재 전정을 추구하고 있으며 공산당은 광범한 민중의 요구를 수렴하여 평화 독립 민주 통일의 중국을 건립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조국 조선에 있어서도 同樣(동양)”이라고 하면서 통일 조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남북의 충돌은 면치 못할 것”라고 하였다. (129-130)
- 중국공산당 연변지방위원회는 1948년 8월 15일자로 「연변 민족문제에 관하여」를 발표하였는데 거기서는 “연변 조선민족 인민의 소수 민족 지위를 확정하고 당의 민족평등 정책을 견결히 관철하는 외에도 반드시 이 민족은 조국이 있는 소수민족이라는 특점의 존재를 반드시 승인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중국인과 같은 권리를 지닐 소수민족(곧 중국 국민 : 필자)으로도 인정하고 아울러 조선인들의 조국이 한반도임을 인정했던 것이다. (130)
- 1948년 12월 연변공산당 서기 劉俊秀(유준수)는 자신이 작성한 「민족정책 중의 몇 개 문제(초안)」에서 연변 경내 조선 인민을 “조선 소수민족으로 승인하며, 이는 중화민주공화국의 일부분이다. 민주 정부의 민족평등 원칙에 근거하여 조선 인민 地權 人權 財權을 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국 경내 조선 인민은 원래 자기의 조국=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지녔음을 승인해야 한다”고 하였다. (130)
- 해방 후 적어도 1950년 10월까지는 조선인들은 한반도를 조국으로 간주하였고 중국공산당 또한 이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131)
- 한반도 조국론은 뿌리 깊은 원초적 민족 감정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반도 조국론은 김일성 등 북한 측에서 조성한 측면도 있다. (131)
- 1946년 10월과 11월 남한에서 이른바 10월 인민항쟁(10월 폭동)이 발발하였고 그 가운데 많은 좌익 인사들이 고난을 겪었다. 연변과 목단강 지구에서는 1947년 2월 이후 남조선 미군의 ‘폭행’을 규탄하고 남조선 ‘애국자’를 지원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북한은 목단강지구 조선인의 조국애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 (131)
- 유준수는 후일 남긴 회고록에서 조선인민들은 대대손손 조선에서 살다가 일제에 의해 쫓겨 왔기 때문에 비록 생산투쟁과 항일투쟁에서 중국에 대한 깊은 감정을 간직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조선은 나의 조국”이라는 감정도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류준수, 1992 <조선족 인민들 속에서> <<승리>>(북경) 708] (131)
- 만주에서 국민당 측과 열심히 싸울 것, 만주에서 활동하는 반공 조선인들을 숙청할 것 그리고 만주에서 인재를 많이 양성하여 조국 건설에 이바지할 것을 “말씀”... 김일성... (132)
- 연변의 경우는 1948년 9월 북한 정부 수립 직후에 뚜렷이 드러났다. 즉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이 북한 정부 수립을 계기로 해서 연변 지방 조선인 사이에서 조국 정부 수립 경축 붐을 불러일으키고 그들 가운데서 ‘조국 사랑 정서’에 불을 댕겼다. (133)
- 북한 정부수립을 축하하는 조선인 대표단이 1948년 11월 10일 평양에 도착해 15일에는 김일성을 방문하였다. (133)
- 북한에 가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대회”에 참여하였던 임춘추는 그곳에서 김일성과 “밀담”을 나누었다. 이후 임춘추는 김일성의 뜻에 따라 ‘직권을 이용하여’, 만주 조선 인민 중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의 경축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아울러 경축 축하 “대표단”을 조직하여 북한에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135)
- 1948년 9월 19일의 행사는 이처럼 김일성의 뜻에 따라 임춘추 등이 주도해서 진행한 것이다. (135)
- 중국군이 6ㆍ25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는 연변 조선인들은 한반도(혹은 조선) 조국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조국관은 한반도에 대한 원초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김일성 등 북한 지도자들의 노력도 작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연변을 비롯한 만주 조선인들을 북한 정부의 영향 아래 두려는 목적하에서 진행된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남북전쟁에 만주 조선인을 동원한다는 전략적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137)
III. 연변 영토귀속 문제
- 영토 귀속 문제는 장기적으로 보면 정체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 중국은 영토적 통합을 하고, 그 다음에는 영토 내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민족정체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수직적 사상적 통합을 하였다. 연변 영토가 중국에 완전히 귀속됨으로써 민족정체성을 장기적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137)
- 김일성은 북한 정부의 수립은 중국 만주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에게도 자주 독립 국가를 가진 조선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137)
- 연변의 귀속 문제는 해방 후 중국 국공내전 기간에도 다시 제기되었다. 그런데 당시 연변을 북한에 병합시키기로 했다는 설이 중국 국민당측 자료에서 나왔다. (138)
- 중국 국민당측 자료... 국민정부 국방부 제2청이 1948년 7월 10일 외교부에 보낸 자료... “소련 대표는 현재 중국 길림성의 연길, 목단강, 목룡 및 그 부근 지역을 북한의 영토로 확정하려고 한다. 현재 상술의 영토에 내에 북한 정규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이 지역의 지방행정 역시 조선인이 주관하고 있어서 실제로 각 지역이 북한에 합병된 것 같다”... “1948년 2월 소련, 북한, 중공이 일찍이 체결한 평양협정에 따라 동북 일부 즉 간도, 안동, 길림 세 자치구를 북한에 획분해 주려고 한다. 지도를 참조하라”고 적혀있다. (138)
- 1948년 7월 당시 연변을 비롯한 만주 각지에 북한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주 조선인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또 외형상 이곳에 조선인 간부들이 많은 직위르 ㄹ차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자 중국공산당이 확고한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46ㆍ1947년, 관내지방에서 온 중국인 간부들이 청산투쟁과 토지개혁을 주도하는 동안 조선인 사회는 크게 위축이 되었었다. (139)
-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조선인들을 귀국했거나 직위를 잃고 비판을 받는 중... 민족주의자들이 창설한 연변의 여러 유수한 중등학교는 통폐합되고 중국인 ‘연안 간부’들이 책임자가 되어 중공의 노선에 따라 교육을 실시하였다. (139)
- 북한 정규군의 도강에 관한 국민당 측의 정보가 있었던 것은 국민당측이 사실을 잘못 파악한데 기인하기 보다는 만주 내전은 중국공산당과의 싸움이 아니라 소련과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 미국의 지원을 더 많이 확보하며 또한 패전의 책임을 호도하려는 의도하에서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141)
- 소련이 연길ㆍ목단강 지구ㆍ목릉 등을 북한에 획분하여 주려한다는 정보도 믿을 수 없다. 중공을 영토를 팔아먹는 ‘매국 집단’으로 모략하는 정치적 선전공세일 가능성이 크다. (141)
- 국공내전 기간 소련이 연길 등을 북한에 할양하려 했다는 점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북한이 연변을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시키려 시도했다는 점은 사실로 보인다. (142)
- 1948년 초에 연변의 자치공화국 성립을 ‘밀모획책’... 자치공화국 건립 문제는... 1948년 11월 북한 정부수립 경축 동북조선인대표단의 북한 입북 때 양측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143)
- 1948년 11월 21일... 김책의 집에서 김책, 박일우, 허가이와 만주의 주덕해, 문정일, 임민호 등 6명이 회합... 연변에 “자치가맹공화국” 성립 문제에 밀담을 진행... 현재 중국은 내전 중이므로 시기상조라는 주덕해의 주장으로 인해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고 한다. (143)
-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에 대한 최초의 언급... 1922년 7월 제2차 당대회... “몽고 티베트 호ㅚ강 3부에 자치를 실행하고 민주자치방(民主自治邦)으로 한다”는 것 “자유연방제의 의하여 중국 본부, 몽고, 티베트, 회강을 통일하여 중화연방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선언... 중일전쟁 시기에 이르면 중국공산당의 소수 민족정책이 변한다. 즉 1938년 10월 중공 제6기 중앙확대 제6차 전체회의 상에서 행한 모택동의 정치보고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종래의 자결권의 보장이 자치권의 승인으로 후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일전쟁 말기에 작성된 모택동의 ‘연합정부론’에서는 다시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존중하였고 그 일반강령에서는 “신민주주의 국가와 정권의 문제에서는 연방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중국의 경내의 각 민족은 그들의 자유의지와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서 중화민주공화국연방을 조직하며 또한 이 연방의 기초 위에 연방의 중앙정부를 조직해야 한다고”고 하였다. (144)
- 영토 귀속 문제는 1949년 1월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가 개최한 민족공작좌담회상에서도 제기되었다.... 김영순(주덕해 부인) 등이 집필한 주덕해 전기(한국 실천문학사 발행)에 의하면 그 회의에서 임민호 등은 연변에서 소련식의 가맹공화국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임춘추를 대표로하는 한쪽은 연변을 북한에 귀속시켜야 우리 민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144-145)
- 임춘추의 ‘사주를 받은’ 임민호 역시 연변지구에서는 반드시 조선족 자결을 실행하고, 연후에 인민의 요구에 근거하여 단일 민족의 사회주의 국가 “북조선에 합병”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연변을 북한에 궁극적으로 귀속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 (145)
- 중국공산당 연변지방위원회의 48년 8월의 문서나, 연변 당 서기 유준수의 48년 12월 문서에서 보면 중국공산당은 연변을 확실히 중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다... 북한과 만주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공헌한 바가 너무나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 (145-146)
- 만주는 북한 입장에서는 한반도와 분리될 수 없는 그 연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항일투쟁에서 혹은 국공내전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의 피가 배어들어갔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46)
- 임춘추가 김일성의 파견으로 연변에 왔다는 점에서 그의 발언은 김일성 같은 북한 지도자들의 의중을 실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46)
- 목단강 시내를 약간 벗어난 남쪽에는 열사능원이 있다. 거기에는 1946년 봄, 국민당 지방부대와 마교하에서 싸우다 한꺼번에 전사한 93명의 조선인 무덤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만주 도처에 조선인 관련 혁명 유적이 많은데, 이점은 조선인들이 혁명과정에서 그만큼 피를 흘렸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46)
- 임춘추가 물러나고 대신 만주 조선인들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 주덕해는 중국의 영토 주권을 인정한 위에 자치를 시행한다는 온건 노선을 걸었다. (147)
- 연변의 북한 귀속을 주장했던 북한이나 만주 조선인 최고 간부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연변을 한반도의 연장으로 생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47)
- 김일성이나 만주의 그 ‘대리인’들의 영토 귀속론이 관철되었다면... 연변 조선인 민족정체성 문제는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147)
IV. 맺음말
- 1) 해방 직후 특히 중국군이 참전하는 1950년 10월까지 연변의 조선인들은 확실히 한반도가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한반도 조국관을 지녔다... 이 조국관은 북한 측이 강화시킨 측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이 기간 영토 귀속 문제가 존재... 이것이 성공했더라면 연변 조선인 민족정체성 문제는 거론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물론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3) 중국공산당은 1950년 말 이후 특히 자치구를 만들면서 민족정체성의 변화를 시도했던 것 같다. 이 점은 역사교육에서 확인되고 있다. (147-148)
- 1953년에 이르러서는 중앙교육부의 지식에 좇아 “조선역사과를 단독으로 설치하지 않고 본국 역사 가운데 조선족의 역사를 취급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역사를 세계사의 범위에 넣고 취급”하도록 하였다. 민족정체성 유지와 향상에 필수적인 민족사 과목이 축소 혹은 폐지된 것이다. (148)
- 연변대학교 교수이자 문필가인 정판룡... 1955년... 중국에 사는 조선 사람들은 조국이 도대체 중국인지 아니면 조선인지를 잘 분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족정풍운동을 겪은 뒤 모두가 오직 중국만이 우리의 조국이지, 중국 외에 또 다른 조국이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 우리의 조국인 이상 우리도 중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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