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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의 광맥] 송창근과 사회윤리 (122-131)
1. 1920년대의 송창근
- 1923년 조선기독교창문사에서 낸 월간지 『신생명』(新生命)... 편집실에는 주간 전영택과 함께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를 갓 나온 청년 송창근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122)
- 함경북도 경흥에서 1898년 태어남... 피어선 성경학원을 나오고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조사... 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엔 이미 교회와 신앙 문제에 대해 일정한 견해를 가진 성숙한 일꾼이기도 하였다. (123)
- 그는 창간호에 “조선기독교의 장래와 신앙문제”에 대한 자기 신념을 발표...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진리를 지혜 있는 자와 통달한 자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으로 이를 알게 하였다는 예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깨닫는데 기독교 신앙의 근본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지자달자(知者達者)란 세상 생활에 영리하고 민첩한 인간들이요, 어린 아이란 “자기의 약점을 깨닫고 우주 창조의 신을 의뢰하는 사람이라” 했다... (123)
- “어린 아해의 생활은 전생(全生)의 생활이외다. 직관과 직감의 생활이외다. 피(被)에게는 아무러한 이론이 없습니다. 주저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선이라고 감(感)하는 그것을 선이라 하고, 자기가 악이라고 느끼는 것은 악이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것은 기어이 한 연후에 마음을 놓습니다. 제가 싫다는 일은 아무리 해라도 하지 않습니다. … 이 사람이 진실된 의미에 있어서 크리스챤다운 크리스챤이외다 … 이러한 의미에서 서기관과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소위 스스로의 지자달자이며 어부, 병자, 세리, 죄인들은 어린 아이로 여깁니다”(1호, 25-6쪽)... (123)
- 그리스도를 거역한 자들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문제는 한국 교회에 “금일의 서기관, 금일의 제사장과 금일의 바리새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고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이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의할 일은 “금일에 있어서 오직 우리 조선기독교회가 적자(赤子)의 신앙에 거하여 주의 다시 오시는 영광의 날을 준비하기외다.” 이 염원과 어린이의 신앙과 “감격의 생활”은 그의 일생을 꿰뚫는 기조였던 것이다. (123-124)
- 기미독립운동... 일제의 탄압... 예수를 다시 쳐다봄... “예수는 평민이다. 요셉과 같은 노동자이다 … 예수는 남의 집 마구밖에 나실 곳이 없었다. 예수는 황야밖에는 기도할 만한 처소가 없었다. 적의 십자가 외에 죽을 만한 자리마저 없었다 … 일개 프로레타리아, 일개 평민, 일개 노동자, 일개 무산자이다”(4호, “사회문제에 대한 예수의 기여”)... (124)
-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애국적 모반자요 사회주의자요 사회혁명가냐? 일면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저의 최대 목적은 인류사회의 개조 그것보다도 만인의 영혼구제이다. 예수의 복음은 어디까지든지 구령(救靈)이 목적이다.” 여기서 그는 사회문제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직시하고 그것을 곧 자기의 입장으로 취하여 평생을 살기로 했다. (124)
- 사회문제를 등한시하지는 않음... 부산에서 “성빈학사”를 경영하고 무산아동의 교육과 사회사업을 함... (124)
- 지도자적 자각을 가진 그로서 선결 문제... 사회를 위한 사업이나 영혼구제에 앞서 그에게는 자기건축(自己建築)이라는 선결 문제가 있었던 것... 1923년 정초에 북간도 용정에서 쓴 편지의 고백... “갑자해부터는 자기건축 사업에 전심전력을 다하겠다는 각심을 하고 다시 합니다. 나는 가장 적극적으로 가장 진취적으로 일층 광대하게 일층 심원한 자기건축 예술에 손을 옮겨야 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지면에 그리는 예술, 돌에다 아로새기는 예술, 그것으로는 감히 바꿀 수 없는 생명의 예술인 것을 절실하게도 깨달았습니다”(7호, “눈 속에 파묻힌 북간도에 와서”)... 사회사업가, 애국지사는 많지만 한국에 이렇다 할 일 하나 제대로 한 인물이 없는 것은 전혀 자기건축에 눈뜬 사람다운 사람이 없었던 탓이라고 내다보았다. 자기건축이란 다름 아닌 극기와 희생의 생활이요, 자기 중심을 떠나서 범인류에의 생활이다... (125)
- “자기건축과 기독교”라는 논문... “진실로 원만한 자기건축의 대사를 성취하려면 자기 건축의 제일의인(第一義人)이 되는 예수의 인격에 체(體)하고 본받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7호, 64쪽)... 그리하여 자기건축의 학문적 토대를 견고히 하기 위해 미국 유학(1925~1930)... (125)
2. 1930년대의 송창근과 그의 사상
- 1930년에 귀국한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였다... 미국에서 주로 연구한 것은 바울신학이었다.... 1933년에 발표한 “기독교 윤리 문제”... 서신형식... 문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적인 신앙에 관계괸 글은 보다 자유로운 인격성을 띤 서신형식이 알맞다고 느꼈나보다. 어쩌면 키에르케고르의 글 형식과도 비교... (125-126)
- “기독교 윤리 문제”...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구명하자는 것... 바울신학... “은총, 신앙, 하나님의 영광, 이 몇가지 말씀이 곧 보라(保羅) 사도의 신앙생활의 내용이었고 모든 신자의 생활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신앙만이 우리 생활의 오직 하나만의 윤리적 생활의 세력 본원”이 된다. 즉 “은총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고” 사는 신앙생활이라 하였다. (126)
- 그러므로 그는 근세에 윤리적, 사회적, 진화와 인간사회의 합리적 이상을 부르짖는 온갖 관념론과 이상주의적 기독교 해석을 배척했다... 인간적 작업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모든 노력과 사상을 배척하고 다만 하나님의 은총만을 기대한다... (126)
- 신학자 송창근은 곧 목회자 송창근이었다... 평양 산정현교회(1933~1936)에서 4년, 김천 황금동교회(1940~1945) 5년 목회... (127-128)
- “오늘 조선교회의 사명”에서 첫째로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하는 참된 예배가 있어야 할 것과, 둘째로는 “조선 교회 즉 학교”라는 표어 아래 한국인의 교양운동이 있어야 할 것과, 셋째로는 복음전도사업을 통해 산 교회가 되고 또한 한국을 살리는 사명이 있음을 논하였다... (128)
- 교회의 사명이 인간을 좀먹고 파괴하는 온갖 악과 싸우는 데 있다면, 교회의 일꾼인 목회자는 이를 위해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 “목사의 사생활론”이 필요하다... 1) 기도생활... 2) 성서애독... 3) 복음전도... 4) 헌신생활... (128-129)
- 송창근에게 힘을 준 것은 “감격의 생활”이었다. 그는 단순히 냉철한 학자가 아니라, 뜨거운 신앙가였고 생활자였다. 그의 신앙생활은 “어린아이와 같은” 하나님 신뢰였고, 감격에 넘친 열혈한(熱血漢)이요, 구원(久遠)의 청년생활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특히 젊은 친지들에게 주는 말로 “감격의 생활”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송창근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글이 바로 이것이리라... (129)
- “감격이 없는 인생 생활에는 창조적 생명이 없다 … 감격성을 떠난 개인이 되는 데 없고 민족이 되는 데 없습니다 … 우리는 불의를 보고도 의분에 날뛸 줄 모르고, 천대를 받아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진선미에 부딪쳐도 그 마음에 영적 충동이 없는 것이외다.” (129)
- 한국의 병... 감격할 줄 모르는 데 있는 것... 기독교인이 운동한다는 것이 겨우 미국의 것을 모방이나 하고 “보수주의자가 중간 경기(景氣)의 혜택으로 겨우 그 자리를 지키는 현상, 이 곳에 어떻게 창조적인 발전이 있겠는가.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 중국 사람과 조선 기독교인이 다른 점은 교리와 신조가 다르고, 교회 유지방법이 다르고, 민족적 생활의 습속이 다르다는 것보다 그 감격의 정도가 다른 데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교회운동은 감격의 충동에 의한 생명운동이 아니라 이해타산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여기에 근본적인 병통이 있다... “오늘과 장래에 조선교회이 주인공으 지자달자 수완과 책사(策士)가 아니외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뜨거운 감격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 교회를 위하여 힘쓰고 일하고 충고하고 걱정할 자객자가 되고 주님 몸된 교회의 주인공이 되실 것입니다. 형제들아, 자매들아, 이해타산에서 떠나서 피와 눈물이 얽힌 주님 사랑의 감격에서 살기를 약속하사이다.” (130)
3. 1940년대의 송창근
- 그는 단순히 이론가나 사색가가 아니라, 열정적인 생활자요 생활예술가였다... 1936년부터 1938년에 걸쳐 그는 부산에서 “성빈학사”를 경영하였다... 『성빈』(聖貧)이라는 잡지의 간행을 통해 정신운동을 전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제의 관헌에게 체포되어 체형을 받게 되자 그의 사회사업은 결국 중단... (130-131)
- 6ㆍ25사변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잃게 하였다. 그 중에도, 양주삼, 남궁혁, 송창근을 일시에 잃었다는 것은 우리의 최대의 손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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