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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의 광맥] “김재준과 진보주의 신학” (231-262)
- 장공의 삶과 사상의 전개는 세 시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 복음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교회의 자립을 위해 신학교육에 전념하던 해방 전후의 시기... 2) 박정희 정권을 전후한 독재정권 밑에서 민주화 투쟁을 통해 민족을 목회한 시기... 3) 민족의 뿌리를 찾고,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바라보며 그의 행보를 옮기던 만년의 삶... (232)
1. 복음의 자유와 신학교육
1. 장공의 회심과 신학수업
- 김재준은 1901년 함경북도 두만강 국경지대에서 태어남... 부친의 훈도를 따라 다섯 살 때부터 유교경전을 공부했다. (232)
- “푸른 언덕 맑은 시내, 숲과 새와 나비와 반딧불, 그리고 그 중에 나도 하나! 들꽃을 꺾고 산나물을 캐고 당귀 미궁 파며 봄의 노을과 여름의 비와 무지개,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백설을 유달리 좋아하며 그 속에서 자라난 ‘자연인’이었습니다... 예술이다 미(美)다 하고 약동하는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살았습니다”(“순례의 길”)... (232)
- “구도자”... 송창근... 김익두... 성 프란시스... 톨스토이... 청빈의 영성과 무소유의 자유... (233)
- 청산학원은 감리교회에서 설립한 학교로서 자유주의의 학풍을 지닌 곳... 프린스턴 신학교와 웨스턴 신학교... 석사논문은 “모세 오경의 비판과 기원전 7세기의 예언운동”... (234)
- 귀국한 장공의 인격과 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소년시절의 자연에 대한 감흥과 회심 후의 청빈사상과 신학수업을 통해 얻은 예언자의 사상과 성격이었다. (234)
2. 역사의식과 예언자의 눈
- 그의 역사의식을 자극하고 그의 사상적 기초를 구축한 것은 예언자 연구였다... 예레미야, 아모스, 이사야... (235)
- 아빙돈 『단권성경주석』... 총회의 결의에 따라 채필근 등은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송창근, 김재준 등은 “교리의 위배를 이유로 한 사과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신학의 자유를 억제하려는 총회의 독단”이라 하여 이에 응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236)
- 예언자의 성격 중의 하나는 “보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자기의 환경을 보기란 어렵다. 자기의 시대를 한 발 벗어나서 그 시대를 볼 수 있는 것이 예언자이다. 김재준은 이것을 “꿰보는 마음”이라고 표현하였다. (236)
- 한국 교회사는 “한국의 교회사”가 아니라 미국의 선교역사의 한 토막을 이루는 데 불과하다고 보았다(『십자군』, 25호)... 한국인의 주체적인 신앙과 교회의 진행이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의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정신적인 노예 또는 미성년자 구실을 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특히 장로교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소위 정통주의라는 보수주의 신앙의 진상을 밝히고 한국 교회의 자주적인 방향을 처음으로 제시한 신학자였다. (237)
- 정통주의 신학과 그 축자영감설은 18세기 유럽에서는 몰락의 쓴 잔을 마셨다... 19세기 말 미국 프린스턴에 모여 반격전을 전개... 1929년을 기해 반동 소수파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19세기 말엽의 프린스턴 출신들이 한국의 초대 선교사로 나오게 되어 그 정통주의 신학의 몰락 직전의 몸부림을 이 한국에 이식하고 철의 장막으로 둘러막아 50년을 보호 육성한 것이 곧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주의의 왕국인 것이다”(『십자군』, 25호).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이 정통주의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세계 교회의 본류에 합류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자주적인 한국 교회사의 제1보를 내디디게 될 것이다. (237)
3. 주체적 목회자 양성 교육
- 은진중학교 교목 겸 성경교사... “교인을 얻으려는 전도기관으로서의 학교가 아니라 다가오는 역사의 격랑에 대결하여 새 세계 인류의 지도자가 될 창조적 소수를 길러내는 학원으로 조형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237-238)
- 간도는 독립운동과 민족주의의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장공의 민족애는 교회를 통한 구국운동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교회의 지도자 양성 교육으로 쏠리게 되었다. (238)
-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교육 방침이란 당시 무식한 대중만을 안중에 두고 이를 지도하기에 알맞을 정도의 교육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조선신학교의 설립은 진정한 의미의 한국 교회사의 신기원이라 하겠다. 그것은 우리의 손으로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일 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주도권과 보수주의 신학사상으로부터의 해방이며, 한국 교회의 자주적인 성장을 촉구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조선교회를 위한 조선 교역자”를 양성하는 기관... 그러기 위하여는 세계 신학계와 호흡을 자유로이 하는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또한 신앙의 자주성을 확립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교육이념을 발표... (238-239)
- 1) 우리는 조선교회로 하여금 복음선교의 실력에 있어서 세계적인 뿐 아니라, 학문적 사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게 할 것. 2) 그러하기 위하여 우리 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찬을 거쳐 자율적으로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도록 지도할 것. 3) 교수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없이 충분한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신학의 제 학설을 소개하고 다시 그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 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도록 할 것. 4) 성서연구에 있어서는 현 비판학을 소개하되 그것은 성경 연구의 예비 지식으로 이를 채택함이요, 신학수립과는 별개의 것이어야 할 것. 5) 어디까지나 조선교회의 건설적인 설계만을 고려에 넣는 시학이어야 하며, 신앙과 덕에 활력을 주는 신학이어야할 것. 신학을 위한 분쟁과 증오모략과 교권이용 등은 조선교회의 파멸을 일으키는 악덕이므로 삼가 그런 논쟁을 피할 것. (239-240)
- 역사의 전진을 무서워하는 보수주의자들과 학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기반으로 전진 성장하려는 조선신학교 계열의 지도자들 사이의 충돌이 시작... (240)
- 1954년에 발표한 대한기독교장로회의 성명서는 “본 총회가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삼을 것과 전세계 장로교회의 주류를 따라 세계교회 회의에 협력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을 적극 추진할 것”을 언명... 이것은 김재준이 그의 신학교육 이념에서 밝힌 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교단임을 표명한 것이다. (241)
2. 역사의식과 민족목회
1. 성육신의 복음과 역사 참여
- 김재준의 사상은 광범위한 것이어서 이를 요약하기란 어렵다... 한국의 신학자로서는 최대량의 논문을 발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예언자를 연구한 구약학자로서 역사참여 의식이 강한 신학교육자였다.” (241)
- 1945년 이후 그의 논문의 중심은 역사참여를 맴돌고 있다. 그 중에도 대표적인 것이 “역사참여의 문제와 우리의 실존”(1958)이다... 역사적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다... 그에게 있어 복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진리’를 중심으로 한 구원의 도리였다... 성육신의 그리스도 사건 이후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영과 육은 이원론적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전된 것이다. 이제는 종교적 관심의 중심이 단순히 초월적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종교... 기독교의 무대는 인간의 역사가 된 것이다... (242-243)
2. 역사변혁의 복음과 선교
- 한국 역사를 그리스도의 천국 역사로 변질시킨다는 의미의 “그리스도화”를 사명으로 하는 한국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곧 장공 신학의 불변의 구조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선교란 곧 세속 역사를 변혁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신앙적 행위이다. (244-245)
- 1966년 어두운 군부의 독재정권이 한국의 역사를 덮기 시작했을 때 장공은 새삼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245)
3. 인권 선교와 민주화 투쟁
- 그리스도 사건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 기독교는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인간이 기독교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의 초점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있다...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신앙에 있는 것이다. (246)
- 독재정권이 감히 인간의 신적 존엄성을 모독하고 억압하기 시작하자 장공은 신앙적 차원에서 민주화 투쟁의 일선에 서게 된 것이다... ‘국제 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위원장’(1972),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1973), ‘민족수호협의회 공동의장’(1973), ‘북미주 한국인권수호협의회 의장’(1975), ‘북미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위원장’(1978), ‘한국 민주통일촉진 국민연합 고문’(1982)... 그의 정치활동은 정당정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고백에 입각한 민족 선교 또는 민족 목회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247-248)
3. 민족문화의 원점과 우주적 공동체
- 그의 신학에는 구조적인 불변의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역사적 전개가 또한 뛰따랐다. 팔십 고령의 원숙한 장공의 인격과 신앙에는 또한 고매하고 원숙한 신학 사상이 들어 있었다. (248)
1. 1980년대의 장공사상
- 송창근은 ‘장공’이라는 아호를 지어 준다... ‘장공’이란 아호는 실로 김재준의 사람됨과 또한 그의 일생을 통해 전개된 사상의 전모를 그리는 이념을 포함하고 있었다. (249)
- 장공의 진면목은 “무아 장공”에 있다. 무엇에도 집착 없는 무소유의 빈 마음이다... “무소유의 빈 마음(空) 속에 몰려드는 사랑의 회오리바람”, “무소유는 사랑을 위한 공간”이라 했다. 여기에는 공즉자비(空卽慈悲)를 풀이하는 대승 불교의 근본 사상이 번영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249)
- 그로하여금 무아장공이 되게 한 것은 불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가 스승으로 모신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찾아오셨고, 앗시시 성 프란시스가 손잡아 주었다... (249-250)
-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서 산다”... 무아에서 ‘신아’(神我)로 전환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랑의 삶을 사는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250)
- 무소유의 방랑성자... 앗시시의 프란시스... 장공이 평생 모신 스승... ‘앗시시의 성자는 나의 보호 성자입니다’ (250)
- ‘창공’은 자연 질서에 속하는 것이요, ‘무아’는 영적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전자가 개체적인 한국 역사를 담는 그릇이라면, 후자는 보편적인 하늘나라를 담는 그릇이다. 장공은 바로 이 두 질서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곳에 서 있었고, 두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데서 삶을 찾았다. (251-252)
- 팔십 고개를 넘어선 1980년대의 장공 신학은 ‘장공’ 본래의 성품을 따라 광대무변한 신학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 정신의 원점을 반만년 전의 환단문화(桓檀文化)에서 찾았고, 기독교 정신의 오메가를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서 보았다. 그리하여 1980년대의 그의 설교와 강연은 언제나 환단문화론과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와의 유기적 연계와 조화를 강조하는 데에 집중되었다. (252)
2. 조국애와 한국문화의 원점
- 조국애... 국토애... 기회가 닿는 대로 쉴새없이 고토를 걸었다... 세 번이나 방문한 곳은 강화도... 장공의 관심을 이끈 것은 단군이 마니산정에 첨성단을 쌓고 하느님께 제사지냈던 사실이다. (253)
- 첨성단... 시편 121편... 조상들이 하나님을 제사하던 첨성단에서 장공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뵐 수 있었던 것이다. (254)
- 선교 2세기를 맞이하는 한국 교회의 과제는 “한국사이 토양에 뿌리박은 한국 기독교를 발견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교회로서의 제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국토애와 민족주체성을 끊임없이 계발하고,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건설과 성장에 더욱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민족은 한국 정신과 기독교 정신과의 일체화에서만 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1930년대 장공의 신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재천명한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와 함께 한국 문화의 원점을 찾아 나섰다. (254)
- 한국 문화의 원점... “원점에 돌아가 새 역사 창조의 새 출발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원점에 돌아간다는 것과 새로 출발한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돌이켜 새 역사의 길을 걷는 그것입니다”... 한국 민족과 문화의 원점은 약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환단시대에 있었다... 『환단고기』... 장공이 관시을 가진 것도 환단시대의 종교사상이었다... (254-255)
- 환단사상의 기본이 되는 틀은 “일”(하나님)과 “삼”(천ㆍ지ㆍ인)과의 관계 구조... 이러한 삼ㆍ일 구조의 틀 위에서 존재론과 인성론과 구원론 등이 전개된다... 『천부경』은 환단 사상의 틀을 집약한 글이다... (255-256)
- “하여튼 그리스도 전 4천 년 때에 이러한 신관이 전민족과 국민, 전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57)
3.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 1983년 장공이 캐나다를 떠나기 직전 ‘하느님 찬가’, ‘메시아 찬가’, ‘성령 찬가’를 지음... 성령은 끝없는 사랑으로써 지금도 새 사람과 새 역사를 창조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안에 영원히 살게 하신다고 읊었다.... 성령님을 “하늘 어머니”로 칭함... (257-258)
-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요, 도달점이다. 말하자면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를 뜻한다... 우리는 이미 사랑의 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또한 이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실현에 있다... 교회는 일반 역사를 하나님 나라 안에 통일하여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본붕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사랑의 공동체의 확장 운동이며, 그 범위는 전우주로 넓혀진다. (259)
- 1)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우주적 사랑의 진화론... 죽재 서남동의 장례식... 2)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하게 한 것은 화난문화론에 접한 사실이었으리라 생각된다... 3) 환단 문화 형성의 핵심이 되었던 종교사상, 곧 한국 정신의 뿌리를 통해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하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정신의 뿌리를 나는 ‘풍류도’라고 했다... (260-262)
- 1930년대의 장공의 꿈인 “한국 민족은 한국 정신과 기독교 정신과의 일체화에서만 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일생을 일관해온 신념이었다. 한국 정신을 풍류도로써 요약하고 기독교 정신의 조직적 파악을 신학이라고 한다면 풍류신학이야말로 장공이 꿈꾼 한국신학의 틀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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