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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자료실]/[한국사]

[백제 8대 국왕] 고이왕(古爾王, 234~286)

by [수호천사] 2022.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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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8대 국왕] 고이왕(古爾王, 234~286)

 

  • 재위 : 234년 ~ 286년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286년

 

고이왕(古爾王)은 구이왕(久爾王)ㆍ고모왕(古慕王)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사서 신찬성씨록, 일본서기등에는 구이(久爾), 구이(仇爾), 고모(古慕)로 이름이 적혀있다. 고이왕은 즉위 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권 강화에 주력하여 부족의 기반을 다져놓았다. 집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좌장(左將)을 설치하여 내외 병마권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초고왕, 구수왕과의 가족관계 여부 연대차이로 이견이 존재한다.

 

삼국사기는 개루왕의 아들(서자)로 언급되지만,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 및 삼국유사에는 초고왕의 외삼촌이라 언급되어 있어 논란이 있으며, 초고왕 사후 20년 뒤에 즉위하여 그때로부터 다시 50년을 재위하였으므로 초고왕의 동생 여부에 이견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구수왕이 죽은 뒤 구수왕의 장자인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어려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사반왕을 강제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기간 중 괴곡(槐谷 : 충청북도 괴산군)ㆍ봉산(烽山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 중이던 신라가 자주 침공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강원도 북부의 말갈과도 충돌하며 나라가 불안정하였다. 또한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대방과는 혼인을 통해 휴전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치세 동안 한강 유역의 부족들이 백제족을 중심으로 결속하면서 백제는 부족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238년]

 

정월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북과 피리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군악대의 시초로 보인다.

 

[246년] 고이왕 13년

 

위나라가 낙랑군(樂浪軍)과 삭방(朔方)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침입하였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기습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 백제가 있었음이 추측된다.

 

고이왕은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서진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의 영역에 자리잡았었다고 추정되는 마한의 목지국(目支國) 세력을 압도하여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고 마한 전체의 실질적인 영도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했다. 현재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동예가 자주 침범해오자 동예와 우호 관계를 조성하기도 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군 및 대방군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徵出)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렸다.

 

[260년] 고이왕 27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여섯 개의 좌평(佐平)을 두고, 그들에게 왕명 출납과 창고 관리, 의례 제정, 형벌 제도, 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시켜 맡아보게 했다. 또한,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했으며, 관직에 따라 자주색, 다홍색, 푸른색 옷을 입게 하는 등 품계에 따른 왕과 귀족의 공복에 관한 제도도 정했다.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하며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활로 쏘아 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무예가 뛰어나고 호방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냥을 갔다는 기록을 보아 사냥을 통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인재를 선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던 걸로 보이며 자신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262년] 고이왕 29년

 

삼국사기고이왕 29(서기 262)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의 3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하게 하라고 명령했다라는 기록을 율령 반포의 근거로 보아 교과서에서는 고이왕 때 율령 반포를 했다고 가르친다.

 

고이왕의 이름은, 주서수서의 백제전에 시조라 기록된 구태(仇台)’라는 이름을 구이로 읽어서 고이와 음운상으로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함으로써 고이왕을 백제의 건국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반면,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고이왕을 초고왕모제(肖古王母弟)”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하여,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優台)-비류계(沸流系)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이왕(8)-책계왕(9)-분서왕(10)-계왕(12)으로 이어지는 왕통을 고이왕계라고 부른다.


[지나치게 긴 수명에 대한 논란]

 

백제 초기 군주들이 그렇듯 삼국사기상에 기록된 생몰년은 정확성을 의심받는데 아버지 개루왕이 사망한 해인 166년에 태어났다고 쳐도 고이왕의 즉위는 234년으로 이 때 고이왕의 나이는 68세이다.

 

어찌어찌 좀 오래 살아서 68세에 즉위했다쳐도 고이왕의 재위기간은 무려 52년이나 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사망한 286년에는 120세가 넘게 된다.

 

때문에 과거에는 고이왕을 초고왕의 아우가 아닌, 초고왕의 아우의 아들, 즉 초고왕의 조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럴 경우 나이가 40세쯤 줄어들기 때문에 52년이나 재위해도 그다지 비현실적이지는 않게 된다지만, 초기 백제사의 기년은 기원후 2~3세기에나 겨우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한성백제의 역사를 무리하게 고구려의 건국 연대에 맞게 백제인 자신들이 수정했다는 게 요즘 중론이므로 이런 추측은 현재 와선 진지하게 논의되진 않는다.

 

개루-초고-구수-사반 계열과 계보가 다르지만 사반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후 정통성을 위해 개루왕의 아들을 자칭했다는 설도 있다.

 

일단 고이왕 재위기 중 후반부 행적과 책계왕의 행적은 적어도 마한 목지국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고고학적 성과와 어느 정도 일치하기 시작하므로, 책계왕 재위기부터는 그럭저럭 삼국사기에 기록된 기년에 맞다고 볼 여지가 높다. 그렇다면 고이왕의 사망 연도에 대해선 삼국사기를 믿을만하지만, 실제 출생연도와 즉위연도는 삼국사기기년보다 늦을 개연성이 있다.

 

[고이왕에 대한 논란]

 

백제 시조 중 하나인 구태=부여 위구태왕이며 위구태왕의 후손인 의려왕과 사돈을 맺은 것이 바로 고이왕이라는 학설도 있다. 목지국 휘하 거수국이었던 백제가 목지국을 일축해 버리고 실질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고이왕 시기로 고이왕이 시조화되었다는 이야기다. 고구려의 연노부 왕실을 계루부의 태조대왕이 찬탈하면서 계루부 고씨 중심으로 계통을 정리했다는 가설처럼 마한의 목지국 권력을 백제의 고이왕이 잡으면서 백제 중심으로 계통을 정리했다는 식이 된다. 한편, 구태의 자는 별 태뿐만 아니라 나 이라는 훈과 음도 있기에 구태가 아니라 구이로 읽힐 여지가 존재한다. 위구태왕 건국설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데 건국과 엮인 중국 측 인물이 바로 요동 공손씨 정권의 태조인 공손도이다. 요동의 공손 일족은 한반도와 많이 접해 있어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데 옛 대방 땅에 백제를 건국했다라는 구절을 옛 대방 땅에 건국한 나라가 백제로 발전했다처럼 절충적으로 해석하면 얼추 맞는다.

 

한편, 이름인 고이를 중고한어로는 ko nië로 읽었는데, 이것이 건길지(鞬吉支)의 건에 대응된다는 견해가 있다. 조선시대에 임금을 뜻하는 말로 긔ㅈ가 있었음이 확인되므로 길지는 독립된 단어임이 확실시된다. 이를 양서에 나오는 경주 월성의 명칭 건모라(健牟羅, 큰마을)에 대응시켜 큰 왕으로 읽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반면에 고이왕과 구태는 관련 없는 인물이라는 분석도 있다. 백제 측에서 자신들의 시조들의 출자를 부여라고 중국에서 떠들었기 때문에 중국측에서 온조의 아버지 혹은 의붓아버지로 추정되는 우태를 구태와 혼돈 했으며 이러한 오류가 반영 되었다는 것. 우태는 소서노가 추모와 혼인하기 이전의 배우자였으며, 이 설에 따르면 구태 또한 부여의 인물이긴 했지만 후대의 인물이며 백제와는 관련 없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고이왕이 백제를 건국 했다는 중국 사서측의 증언을 반박하는 셈이다.


[가족관계]

 

  • 부왕 또는 선조 : 개루(蓋婁, ? ~166, 재위:128~166)
  • 모후 : 미상
  • 형 : 초고(肖古), (고이왕과의 나이 차이 때문에 고이왕의 형인지 논란이 있다)
  • 국왕 : 고이(古尒, ? ~286, 재위 : 234~286)
    아들 : 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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