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관련]/[한국사]

[백제 10대 국왕] 분서왕(汾西王, 298~304)

by [수호천사] 2022. 4. 6.
728x90

[백제 10대 국왕] 분서왕(汾西王, 298~304)

 

  • 재위 : 298년 ~ 304년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304년

 

분서왕(汾西王)은 책계왕의 장자로 외모가 준수하여 왕위에 올랐다.

 

한군현(漢郡縣)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부왕이 사망하자, 어려서부터 의표(儀表)가 준수했던 분서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분서왕은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폈던 것으로 보인다.


[298년]

 

10월 대규모 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잡았다.

 

[299년]

 

동명왕묘에 참배했다.

 

[302년]

 

4월 혜성이 대낮에 떨어지는 기상 이변이 있었다.

 

[304년]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격했을 때 낙랑군 태수가 보낸 정예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고이왕의 손자인 분서왕이 피살된 뒤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분서왕은 고이왕 계열인 데 반해 비류왕은 초고왕 계열이라고 한다. 그런고로 고이왕계의 두 군주이 연속해서 피살당함으로써 고이왕 세력이 몰락하고, 초고왕 세력이 다시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류왕의 뒤를 이은 제12대 계왕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므로 고이왕계이지만, 결국 고이왕계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분서왕은 책계왕과 마찬가지로 낙랑 등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폈던 것으로 보이나 3042월의 낙랑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는지 30410월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비류왕이 분서왕을 암살하도록 낙랑군에 사주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알 수 없다. 일단 비류왕 즉위 기록을 보면 분서왕이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도 모두 어려서 비류왕이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고 써 있어서 더욱 비류왕 배후설에 설득력이 생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책계왕에 이어 분서왕까지 한군현의 세력에 살해당할 정도이니 그만큼 백제의 위용이 한군현에 크게 압박을 줄 정도로 성장했다고도 볼 수 있다.


황창랑(黃昌郞)이라는 이름의 신라 출신 소년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창랑이 바로 삼국사기에 언급되는 낙랑군에서 보내 분서왕을 죽인 자객이라고 서술하는 경우도 있는데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는 황창랑이라는 인물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조선 시대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되는 인물이다. 조선시대에는 황창랑이라는 소년 검객이 백제 왕을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모양인데 어느 기록에서도 황창랑이 찔러 죽인 왕이 분서왕이라고 콕 찍어 명시하고 있지 않다. 애당초 백제 왕 중에 살해당했거나 정황상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왕들이 분서왕 말고도 너무 많아서 어느 시대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하는 황창랑이 암살한 백제 왕이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다.

 

黃昌郞 不知何代人 諺相傳 八歲童子 爲新羅王 謀釋憾於百濟 往百濟市 以劍舞 市人觀者如堵墻 百濟王聞之 召入宮令舞 昌郞於座 揕殺之
황창랑은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 모르나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그가 8살 난 어린아이로써 신라 왕과 꾀하여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잣거리에 가서 검춤을 추니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라 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한다.
속동문선권 제4, <칠언고시>

 

도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
효종대왕께서도 후원(後苑)에서 기예를 시험하셨는데, 그때에 이상진(李尙眞)이 백제(百濟) 황창랑(黃昌郞)의 검무(劍舞)의 일을 끌어대기까지 하면서 간쟁하였습니다.”
현종개수실록현종 5(1661) 611

[가족관계]

 

  • 부왕 : 책계왕
  • 모후 : 보과부인(寶菓夫人) - 대방군(帶方郡) 태수(太守)의 딸
  • 왕비 : ?
  • 아들 : 계왕(12대)
  • 며느리 : ?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