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13대 국왕]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 재위 : 346년 9월 ~ 375년 11월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346년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백제의 제13대 국왕이다. 이름은 중국의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 일본의 《고사기》에는 조고왕(照古王), 《일본서기》에는 초고왕(肖古王)등의 이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는 속고왕(速古王)으로도 불린다.
근초고왕은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차츰 부족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컸기 때문에, 둘째 아들임에도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둘째 아들(二子)’로 기록된 왕들(고이왕, 비류왕, 근초고왕)은 정변 등 비정상적인 과정으로 왕이 되었음을 시사하며, 같은 왕계의 선대 왕의 둘째 아들로 조작하느라 수명이 비정상적이 된 것으로 본다.
근초고왕 이하 초고왕계 부여씨 왕실의 정치적 파트너는 진씨(眞氏) 가문이었는데, 이 진씨 가문은 비류왕 때 진의(眞義)가 내신좌평이 된 이래 근초고왕 때 진정(眞淨)이 왕후의 친척으로 조정 좌평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는 진고도(眞高道)가 왕의 장인으로 내신 좌평이 되는 과정을 거쳐서, 공히 백제 최고의 외척이자 엘리트 귀족 가문이 되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정(淨)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까다로웠다.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년
이처럼 근초고왕과 혼인으로 연결된 진씨 가문은 비류왕 계열의 근초고왕이 고이왕 계열의 계왕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을 데에도 크게 공헌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러한 진씨 가문의 독주는 곧 정도를 넘어서기 시작한 듯하고, 이후 《일본서기》 등 근초고왕의 재위 후반부 활동에는 진씨를 대신해 사씨(沙氏)와 목씨(木氏)가 대대적으로 등장하여 왕의 대외 활동에 공헌하게 된다.
근초고왕은 남으로 전라도 지역까지 마한 연맹체를 부분적으로 통일하였고, 북으로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371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근초고왕이 즉위하기 전 백제는 북쪽으로 완충 지대 역할을 하던 한사군(낙랑군과 대방군)이 314년까지 전부 미천왕의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면서 고구려와 처음으로 국경선이 맞닿았고, 고구려의 위협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온 중차대한 위기 상황이었다. 게다가 백제는 분서왕 때 기록을 봐선 대방군과 친해서 혼인동맹도 맺고, 반면 고구려와는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고구려가 백제 북쪽을 전부 차지하게 되면서 상황이 난처해졌고 결국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364년]
근초고왕은 가야의 부족국가 가운데 하나인 탁순국(위치 미상)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366년]
3월에는 사신을 보내 신라와 동맹을 맺고, 탁순국 왕을 통해 야마토 왕조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하였다. 당시 야마토 왕조는 탁순국에 사신 시마노스구데를 파견하였다가 백제가 왜와 통교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시마노스구데는 근초고왕에게 부하 니하야를 파견하였다. 근초고왕은 니하야를 반갑게 맞이하여 오색의 채견 1필, 각궁의 화살, 그리고 철정 40매를 선물로 안겨 돌려보냈다.
[367년]
신라 사신 편에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를 딸려보냈다. 이들이 함께 왜에 도착함으로써 백제와 야마토 사이에 국교가 수립되었다.
[368년]
근초고왕은 신라를 존경하여, 368년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명마 두필을 신라에 선물하기도 했다.
[369년]
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군사 2만을 이끌고 치양성(황해도 배천군, 구모로성)에 쳐들어왔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를 보내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고구려군 5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고구려로 도망쳤다가 마음을 고쳐 돌아온 백제인 사기(斯紀)가 제공한 고구려의 군사정보 덕분에 태자가 고구려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11월, 근초고왕이 한강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황색 깃발을 사용했는데, 황색은 중앙을 뜻해 중국에서는 황제의 색으로 사용했으니, 이는 고구려에게 승리한 백제가 황제국임을 과시한 것이다.
[371년]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와 함께 패수(예성강)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옛 대방(현 황해도)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어 여세를 몰아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왕이 태자와 더불어 정병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쳐들어가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힘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조
<고구려 본기>에는 10월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명기한다.
고려의 신라계 대학자 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에는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표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태자 근구수가 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창에 꽃아 효수하였다 한다.
백제국은 마한 54개 부족국가 연맹체를 상당히 통일한 것은 물론, 고대 부족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근초고왕은 이러한 영토 확장을 기반으로 마한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왕위의 부자 세습 제도를 확립하였다.
[372년]
《진서(晉書)》에 따르면, 372년 음력 1월과 6월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 한편,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직기와 왕인을 왜에 파견하여 왜왕이 그들을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왜왕에게 칠지도가 보내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근초고왕은 또한 왕실의 귀함을 알리고 국가 체제를 굳건히 할 목적으로 박사 고흥에게 명하여 왕실의 역사를 정리한 《서기》를 저술했으나 소실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이 철정 40매를 왜국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왜는 근초고왕 재위 시에 가야와 백제로부터 철기를 수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373년]
신라 <내물 마립간 본기>의 독산성 관련 기록이 있다. 당시 백제의 독산성 성주가 300여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는데, 이에 근초고왕이 돌려주기를 요청했으나 내물 마립간이 거절하였다. 독산성 성주가 신라에 망명한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었거나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문책이 두려워 제3국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375년]
고구려에게 수곡성을 빼앗겼지만, 흉년이 들어 보복하지 못했다.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
[가족관계]
- 부친 : 비류왕
- 모친 : 미상
- 배우자 : 진씨(眞氏)
- 자녀 : 근구수왕(近仇首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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