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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바]

방호산(方虎山, 1916년 ~ 몰년미상, 1959년 이후)

by [수호천사]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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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산(方虎山, 1916년 ~ 몰년미상, 1959년 이후)

공산주의 항일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이다. 연안파로 분류된다.


【1916년】

 

  • 191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1913년 출생이라는 설이 있다). 이명은 이천부(李天夫 혹은 李天富)이다.

 

【1931년】

 

  • 만주사변 직후에 중국에서 동북항일연군 제4군의 전신인 중국 공산당 헤이룽장성 미산현(密山縣) 유격대에 합류하여 항일 운동을 벌였다.

 

【1937년】

 

  •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이익연구학원(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녔다.

 

【1939년】

 

  • 3월, 모스크바를 떠나 9월 연안에 도착하였다.

 

【1940년】

 

  • 항일군정대학동북간부훈련반에서 수료하고 중국공산당 팔로군 일선부대에 파견되어 조선반에서 조선해방문제를 연구하였다.

 

【1945년】

 

  • 2월, 연안에서 정식으로 개교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제1구대 협리원이 되었다.
  • 11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동북지방으로 이동하여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치위원으로 남만주 일대에서 군대 증강과 조선인 보호 등에 활동하였다.
  •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동북내전(東北內戰) 기간 동북민주연군(東北民主聯軍) 이홍광지대(李紅光支隊)의 정치위원으로 중국공산당의 반국민당 전투에 참전하였다.

 

【1949년】

 

  • 7월, 조선인들이 절대 다수인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사단장으로로서 부대를 이끌고 입북하였다. 동 부대를 제6사단으로 개편하고,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 무정 등의 다른 팔로군 출신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군사학을 공부하였고 실전경험도 풍부했기 때문에 6ㆍ25 전쟁 당시 가장 유능한 북한군 지휘관이었다. 인민해방군 166사단에서 이름만 바뀐 6사단 또한 마찬가지로 정예 중의 정예였다. 곧이어 발발한 6ㆍ25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건 어찌보면 예상된 일이었다.
  • 김일성의 요청으로 모택동이 북한군에 편입시킨 조선인 팔로군은 10개 연대 규모였다. 이는 북한군 전체 병력의 거의 절반 규모였다. 6ㆍ25전쟁 당시 인민군 21개 보병연대 중 거의 절반인 10개 연대가 중국에서 건너온 조선족 팔로군부대였다.
  • 이들 10개 연대가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 주력부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6ㆍ25전쟁은 사실상 중국 팔로군의 남침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휘관도 마찬가지다. 6사단장 방호산뿐만 아니라 1군단장인 김웅은 중국 팔로군 연대장 출신, 2군단장 김광협, 10사단장 이방남, 4사단 이권무, 5사단장 김창덕, 12사단장 최인 등 모두 중국 팔로군 출신이었다.

 

【1950년】

 

  • 한국 전쟁 당시에는 제6사단을 이끌고 김포반도를 통해 제일 먼저 한강을 도하하였으며 충남과 호남 일대를 점령하여 휘하의 6사단과 빨치산 등을 통해 점령지역들에서 양민을 학살하였고, 이후 진주, 마산까지 진출하는 등 전공으로 제6사단은 근위사단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 만일 이들이 금강을 도하했다가 미군을 과대평가한 군단 사령부에 의해 조치원으로 역행군하지 않았더라면, 또는 방호산이 호남의 항구도시인 여수와 목포를 점령하겠다고 이틀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낙동강 방어선은 형성과 동시에 치명적인 일격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의 두 이유로 방호산은 적기를 놓쳤으며, 7월 말 뒤늦게 이들을 포착한 미군이 북서쪽을 담당하던 미 육군 25사단을 부랴부랴 마산 방면으로 돌려 가까스로 전선을 틀어막게 된다.
  • 미군에게 인민군 6사단은 유령부대로 불릴 정도였다.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이 마산을 공격했을 때가 6ㆍ25전쟁에서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였다고 전사가들은 말한다. 우리로서는 패전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였다.
  • 당시 워커 장군이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은 이제까지의 한국전쟁을 통해 가장 훌륭한 기동이었다”고 극찬하였다.
  • 7월 12일, 공주를 점령하였다.
  • 7월 19일, 금강을 도하하고, 사단을 3개로 나눠 7월 20일 김제, 전주를 점령했다.
  • 7월 24일, 인민군 6사단 예하 13연대가 목포항을 점령하고 또 다른 연대는 25일 여수항을 점령했다.
  • 7월 28일, 방호산은 각각 1개 대대씩 항구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전 병력을 하동에 집결시켰다. 인민군 6사단 방호산부대의 우회기동 공격에 국군과 미군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대구와 왜관 등 낙동강에 치중된 상태였기 때문에 섬진강 일대는 사실상 방어병력이 없다시피했다. 하동전투에서 초대 육군참모총장이던 채병덕 소장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국군 1개 대대는 궤멸되었다. 하동이 뚫리자 바로 진주도 인민군 6사단의 수중에 떨어졌다.
  • 진주 다음은 마산이다. 마산까지 함락되면 부산은 바로 지척이다. 중국 대륙을 누비던 방호산 사단은 유유히 마산의 길목인 진동지역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워커 사령관은 상주에 있던 미 25사단 예하 27연대를 마산으로 긴급 이동시켰다. 6ㆍ25전쟁에서 진동리지구 전투로 불리는 마산 서부지역 전투는 1950년 8월 2일부터 9월 14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한국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유격전에 특화된 팔로군 출신 인민군 6사단은 미군의 공중폭격과 막강한 포병화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부산 코앞인 마산에서 인민군 6사단의 진격은 차단되었다.]
  • 1950년 10, 제5군단장에 임명되어 동부전선 전투를 지휘하였다.
  • 인천 상륙작전을 위시한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북한군이 후퇴할 때에도, 부대편제가 와해되어 무질서하게 패주한 여타 부대들과 달리 부대편제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주변의 낙오ㆍ패잔 병력들을 수습해 후퇴 이전보다 오히려 사단 인원수를 늘려가며 질서정연하게 북으로 퇴각한 공로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하나 더 받아 2중 영웅이 되었다.
  • 6ㆍ25 전쟁 당시 공화국2중영웅 칭호를 받은 인물은 방호산을 제외하면 다섯 명 뿐이었다고 한다. 이때, 6사단에서만 공화국 2중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은 방호산을 포함해 3명이나 되었다. [각각 6사단장 방호산, 6사단 정찰과장 리학문, 6사단 507군부대 소속 김기우]
  • “김일성의 무너진 군대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병력은 방호산(方虎山)이 이끌었던 6사단이었다. 방호산의 6사단은 개전 초기에 내가 임진강에서 이끌었던 국군 1사단의 전면을 치고 들어온 부대였다... 그들은 이후 충청도를 거쳐 전라남북도를 휩쓸었다. 이어 진주와 마산을 향해 공격을 펼치면서 결국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 방호산은 중국 공산당 계통인 팔로군(八路軍)에서 10여년 간 있으면서 전쟁의 경험을 쌓았던 인물이다.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양해에 따라 팔로군에 있던 한인(韓人) 병력의 166사단을 이끌고 북한에 들어가 6사단장을 맡았다. 그는 대한민국의 전남북 일대를 휩쓸면서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전쟁의 측면에서 보면 방호산은 그나마 싸움에서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잘 이해했던 사람이다.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에 밀려 후퇴할 때 거의 유일하게 제 병력을 건사해 산맥의 줄기를 타고 북상했다. 그런 공로로 그는 그 직후 군단장으로 승진했다.” 〈백선엽의 6ㆍ25 징비록〉

 

【1951년】

 

  • 1950년 10월에는 방호산 휘하의 6사단이 확대 개편돼 5군단으로 승격되면서, 방호산도 북한군 5군단장으로 진급하였다. 북한군 5군단은 그의 지휘 하에 현리 전투에도 참가해 큰 공을 세웠으며, 정전협정이 가시화하자 그는 당시 창립된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 6ㆍ25 전쟁 당시 북한군 중좌로 방호산의 6사단에서 정치 장교로 근무했던 최태환씨에 따르면, 무인이라기 보다 문인 스타일의, 점잖고 부드러운 성격이었다고 한다.

 

【1955년】

 

  • 1955년부터 김일성이 박일우를 비롯한 친중 군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 1월, 군사과학원장에서 해임당했으며 빨치산파의 최용건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방호산을 종파분자로 규정하여 김웅도 숙청하였다.
  • 4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박일우, 김웅, 방호산을 ‘구 중공당원 소 그루빠’로 규정하여 이들을 친중반소파, 마오쩌둥의 졸개로 몰아서 모든 칭호와 공훈을 박탈했다. [일설에 따르면 함경남도 단천군 검덕광산의 후방부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1956년】

 

  • 6월, 영웅칭호를 받았다.

 

【1958년】

 

  • 8월, 인민군 제5군단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 ‘8월 종파 사건’(1956년)에 연루되어, 1959년 연안계가 기도한 반당ㆍ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숙청되었다.
  • 8월 전원회의 사건 이후 1959년, 장평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음해하여 숙청한 김일성은 방호산, 김웅, 장평산, 리광무, 노철갑, 최원 등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김강의 증언에 따르면 박일우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 1956년 8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창익(崔昌益)·윤공흠(尹公欽) 등 연안계(延安系)가 기도한 반당ㆍ반정부 활동이었던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1959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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