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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바]

박용희 [朴容羲, 1884~1959] 장로교 목사, 민족운동가

by [수호천사] 2024.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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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희 [朴容羲, 1884~1959]

장로교 목사, 민족운동가

【1884년】

  • 12월 11일,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였다. [충청북도 중원 사람 혹은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기록도 있다.]
  • 일찌기 기독교인이 되어 연동교회에 출석하였다.

 

【1907년】

  • 대부흥운동이 한참이던 1907년, 경기도 강화도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스스로도 기부금을 납부하였다.

 

【1908년】

  • 연동교회 교인 이명헌ㆍ배선표ㆍ박제원 등과 함께 성결교회(당시 동양선교회)로 옮겨 한때 무교동 복음전도관(현 중앙성결교회)에 출석하였다.
  • 일본에 건너가 동양선교회가 운영하는 토오쿄오 성서학원에서 수학한 후 돌아왔다.

 

【1911년】

  • 농촌전도에 뜻을 두고 1911년 연동교회에서 개척한 경기도 용인군 장평리교회로 내려가 최응주ㆍ원세성 등과 함께 농촌사업을 통한 선교를 전개하였다.

 

【1919년】

  • 3ㆍ1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해 4월 이규갑ㆍ장붕ㆍ현석칠 등 기독교인들과 함께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 설립을 선포하였다.
  •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고 11월 경기도 고양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상해에서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교사, 전도사, 기자 등을 역임하면서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1921년】

  • 용산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 경충노회 서기로도 활약하였다.

 

【1922년】

  • 이상재ㆍ윤치호ㆍ박승봉ㆍ유성준ㆍ전필순 등과 함께 순전히 한국인의 힘으로 출판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기독교창문사를 창립하였다.

 

【1924년】

  • 안성읍교회 조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 제1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부회록서기를 역임하였다.

 

【1925년】

  • 신학교를 졸업하지는 않았으나 경기노회의 특별 가결로 안성읍교회 위임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 제1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부회록서기를 역임하였다.

 

【1927년】

  • 경기노회장을 역임하였다(1927~1928년).
  • 11월, 신간회 안성지부장을 역임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 안성읍교회를 사면하고 승동교회로 옮겼으며(1928~1935년) 한때 숭이동교회도 함께 시무하였다.
  •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승동교회에 재직하는 동안 왕족 출신 명예목사인 이재형(1871-1949) 목사와의 대립으로 상당한 갈등을 겪었으며, 그의 민족적인 성격으로 인해 선교사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1929년】

  • 제6회 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교회연합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 10월, 교회 내부의 학교 및 기관의 운영으로 갈등을 빚고 있던 김해읍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화해위원으로 교단에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 승동교회에서 시무할 당시 『사랑의 종교』라는 제목으로 설교집을 출간하였는데, 서문을 쓴 평양신학교 교수 남궁혁(1882~1950)은 그를 크게 칭찬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 YMCA의 신흥우를 중심한 적극신앙단이 서울에서 조직될 때 참여하였다.

 

【1934년】

  • 11월 21일자에 실린 “교회의 의미”라는 제목의 설교는 당시 서울 응암교회 신축 낙성 예배 당시 그가 에베소서 1장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정규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그가 상당한 식견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35년】

  • 함태영ㆍ권영식ㆍ전필순ㆍ최석주 등 경기노회원 중 비서북계 인물이 중심이 되어 경중노회를 창설하는데 함께 참여하여 장로교 총회내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 승동교회를 사임하고 목포중앙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다.

 

【1938년】

  • 전남 순천중앙교회로 전임되어 순천노회장을 역임하였다.
  • 이때 그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가담하였다.

 

【1940년】

  • 10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42년】

  • 9월 30일,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해방 때까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45년】

  • 해방후 김영옥ㆍ신의경 등과 함께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역임하였다.
  • 영등포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 12월, 이승만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당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는 좌익으로 15명, 우익으로 24명 등 모두 39명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위촉되었는데, 박용희가 이에 선정된 것이다.

 

【1946년】

  • 1월, 강태희ㆍ최동ㆍ최석주ㆍ신창균ㆍ박용래ㆍ박용준ㆍ김영선ㆍ김수철ㆍ김영주ㆍ김춘배ㆍ신창균ㆍ유재기 등과 함께 “교회의 문을 나서서 이 민중들 사이로 들어가 산업ㆍ문화ㆍ교육ㆍ정치 등 각 방면에 그리스도 정신을 침투시키며, 민족 심령의 개조를 외쳐 민족갱생운동과 신문화 전선을 위하여 전선을 베풀기위한 정당운동이 아닌 정치의 근본운동을 위하여” 기독신민회를 조직하고 그 초대 회장이 되었다.
  • 4월,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독립당 창당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한 좌우합작위원회에도 참여하였다.

 

【1949년】

  • 제35회 예수교장로회 부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50년】

  • 5월 30일 열린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는 못하였지만, 거물급 정치인으로 언론에 묘사되었다.
  • 피어선기념성경학원 명예원장을 역임하였다(1950~1953년).

 

【1953년】

  • 신학노선의 차이로 장로교회가 분열될 때 그는 기독교장로회에 속하게 되었다.
  • 이후 한국신학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 제39회 대한기독교장로회(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 제40회 대한기독교장로회(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 5월 16일, 7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기타】

  • 박정희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노태우 정부는 박용희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가로 추서하였다.
  • 현재 박용희의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351번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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