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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링스 [Bliss Washington Billings, 1881~1969]
변영서(邊永瑞), 미국미감리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1881년】
- 1월 27일, 미국 오하이오주 그린필스에서 워싱턴 빌링스(Washington G. Bilings, 1854~1884)와 애너 히브(Anna Heeb, 1858~1933) 사이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92년】
- 감리교회에 출석하였다.
【1893년】
- 종교적 회심을 체험하였다.
【1902년】
-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계통의 인디애나주 드포대학(DePauw College)을 1902년 졸업하였다.
- 졸업한 후 고등학교 교사로 3년간 사역하다가 목회와 해외선교에 대한 소명감을 느끼고 개릿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8년】
- 개릿신학교를 졸업하였다.
- 신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파송을 받아 1908년 여름 내한하였다.
- 평양선교부에 배속되어 북장로회와미국 미감리회 선교부가연합으로 운영하는 숭실학당 중학부와 대학부 교사로 영어ㆍ성경ㆍ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숭실학당에 파송된 미감리회 선교사로는 빌링스 외에 ‘엘비언대학 동창’ 베커와 크리쳇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로부터 ‘교육 전담’ 선교사로 파송되어 북장로회, 남감리회 선교부와 교육분야 선교협력을 과제로 부여받았다.
【1909년】
- 4월, 평양에서 이들 세 선교부의 교육 선교사들이모여 ‘한국기독교교육협회’를 조직할 때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 6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개최된 미감리회 매년회에서 해리스 감독은 빌링스에게 집사목사로 안수하여 숭실학당 사역 외에 칠산과 구골구역 담임도 맡겼다.
- 7월 25일, 연회를 마치고 평양에서 북장로회 선교사 헬린 테일러(Helen Isabella Taylor, 1883~1968)와 결혼했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테일러는 북장로회 해외여선교부 파송을 받아 1908년 11월 내한하여 서울선교부에서 어학 공부를 하면서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로 적을 옮겼다. 미국에서 빌링스의 어머니가 와서 결혼식을 참관한 후 돌아갔다. - 목사안수와 결혼식을 치른 후 본격적으로 숭실학당 사역과 구역 목회를 시작하였다.
【1910년】
- 1월, 개성모임에서는 “성령과 학교복음화 방안”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 연회 후 숭실학당에서는 가을학기에 주간 18시간, 봄학기에 주간 20시간 강의를 하였고, 숭실학당 외에 남산현교회 부속 광성학교도 맡아 170명 학생을 가르쳤고 광성학교에서 야학도 시작하였다.
- 8월, ‘경술국치’를 맞아 침울한 사회분위기에서 평양지역 교인들은 특별기도회와 전도대회를 열었고 숭실학당과 광성학교 학생들은 밤마다 등불을 켜서 시가행진을 하며 전도하였다. 빌링스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행렬에 동참하였다.
- 학교 강의가 없을 때면 부인과 함께 평양 시내 구골교회 외에 칠산ㆍ맹산ㆍ진남포ㆍ증산ㆍ강서ㆍ봉산ㆍ서흥ㆍ신계 지역을 순회하며 교회를 돌보았다.
【1911년】
- 3~4월, 미국의 저명한 교육학자 마키스(W. S. Marquis) 박사의 방한을 계기로 서울과 평양에서 교육관련 선교사회의가 열렸고 결과물로 선교협력을 위한 초교파적 ‘교육평의회’(Educational Senate)가 조직되었다. 미감리회 선교부를 대표로 노블과 베커, 빌링스, 크리쳇 등이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교육평의회의 주요 안건 중 하나는 기독교연합대학 설립이었다.
【1912년】
-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남감리회 선교부는 1912년 연합대학 설립을 결의하고 그 위치를 놓고논의를 시작했다. 빌링스를 비롯한 미감리회 대표들은 일찍이 서울을 후보지로 정한 후 북장로회의 서울과 평양 선교부 사이의 이견이 조정되기를 기다렸다.
- 빌링스는 1912년 여름 기독교청년회(YMCA) 여름수련회 강사로 참여하였고 그해 맏아들 폴(Paul)을 얻었다.
【1913년】
- 6월, 연회에서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4년】
- 3월, 해주지방 사경회 강사로 참여했다.
- 가을에야 기독교연합대학 위치가 서울로 확정되었다.
- 10월, 평양에서 딸 헬렌(Helen Elizabeth)이 출생하였다.
【1915년】
- 2월, 평양에서 개최된 북장로회의 평양ㆍ재령ㆍ선천선교부 연합 선교사대회에 참석하여 “관립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 방책”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 평양선교부에 있던 베커와 빌링스 등 미감리회의 ‘교육선교사’들이 1915년 4월 서울선교부로 옮겨 연합대학 설립에 참여하였다. 베커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4월부터 중앙기독교청년회관을 빌려 수업을 시작한 ‘조선예수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 문과 교수로 영어ㆍ역사ㆍ성경을 강의하였다.
- 여름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 뉴욕 유니언신학교에서 1년간 석사과정을 공부하였다.
【1917년】
- 서울로 돌아와 7월, 둘째 딸 메리(Mary Louise)를 얻었다.
- 그 사이 연합대학은 1917년 4월 서대문박 신촌(연희동)에 새 교사를 마련한 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아 새로운 환경에서 수업하고 있었다. 빌링스는 연희전문학교 문과과장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1918년】
- The Korea Mission Field 편집으로 참여하였다.
- 9월, 북장로회의 클라크, 쿤스, 남감리회의 히치 등과 함께 ‘중국인 선교회’를 조직해서 중국인 화교를 위한 선교사업을 초교파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서울시내 주일학교 교사 연합수련회 강사로 참여하였다.
【1919년】
- 3ㆍ1독립운동 때 상당수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투옥되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 특히 1918년부터 연희전문학교 외에 서울 중앙교회 담임까지 맡았는데 중앙교회 전도사였던 김창준이 3ㆍ1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투옥됨으로 그도 경찰의 감시와 주목을 받았다.
【1921년】
- 1월, 셋째 딸 포티아(Portia Margaret)가 태어나는 기쁨을 느꼈다.
- 6월, 첫째 딸 헬렌이 천연두를 앓다 사망하였다.
- 6월 22일, 세브란스의학교 6회 졸업식에 참석해서 이상재와 축사 순서를 맡았다.
- 11월 1~8일,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주일학교대회에 전국에서 960명이 참석하였는데 대회 후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22년】
-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여 뉴욕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교육학으로 석사 핛위를 받았고 모교인 드포 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22~1923년).
【1924년】
- 귀한 후 연희전문학교와 중앙교회 사역을 재개하였고 1924년 5월 30일 서울주재 외국인들이 대거 참석한 미국 현충일(Memorial Day) 모임에서 대표 연설을 하였다.
- 미국 여성절제운동 지도자 틴링의 방한으로 한국에서 기독교여자절제회(WCTU)가 조직되었는데 빌링스 부인이 먼저 외국인 중심으로 절제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한국 여성들의 절제회 조직을 지원하였다. 빌링스 부인은 「기독신보」에 절제운동 관련 기사를 연재하여 절제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과참여를 끌어냈다.
【1925년】
- 2월, 막내딸 앨리스(Alice Marie)가 출생하였다.
【1927년】
- 8월 23~30일, 여자기독교청년회(YWCA)와 기독교청년회(YMCA) 학생연합수련회 강사로 참여하여 “청년의 각성”이란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9년】
- 6월 9일, 서울 중앙교회에서 ‘빌링스 박사 선교 2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김창준 목사의 사회로 강연경의 독창과 옥선진의 축하강연이 있었고 중앙교회 교인들은 ‘일곱 가지로 된 촛대 한쌍’을 빌링스 부부에게 증정했다.
- 8월 10일, 정동교회에 개최된 ‘미국 대통령 하딩 추도회’에 참석, 선교사 대표로 연설하였다.
【1930년】
-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했다가 1930년 9월 귀환했다. 그 사이 남북 감리회 합동운동이 결실을 얻어 1930년 12월 합동총회와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
- 3년 동안 실험적으로 ‘남녀공학’ 수업을 해왔던 협성신학교와 협성여자신학교도 합동을 결의하여 1931년 봄학기부터 ‘감리회신학교’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감리회신학교로 합동 수업을 시작한 직후 신학생들의 케이블 교장 배척운동이 일어나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선교부는 케이블과 빌링스의 임지를 서로 바꾸기로 했다.
- 1월 19~24일, 이화여전 학생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932년】
- 빌링스는 1932년 봄학기부터 감리회 신학교 교장으로 신학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신학교에서는 신약과 교회사를 강의하였다.
- 1932년부터 3년간 서울 외국인연합교회 담임을 맡았다.
【1933년】
- 9월 19~21일, 제10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영문서기를 맡았다.
- 11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부부가 귀국하였는데 미국 도착 직후 결국 어머니는 별세하였다.
【1934년】
- 어머니 장례식를 치르고 1934년 2월 서울로 귀환하여 신학교와 외국인연합교회 사역 외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조선예수교서회, 조선찬송가위원회,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연희전문학교의 이사 및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35년】
- 6월, 양주삼 총리사와 함께 만주 신핑에서 열린 기독교조선감리회 만주선교연회에 참석하여 만주지역 목회자와 교인들을 격려하고 돌아왔다.
【1937년】
- 5월 25일, 신학생들이 주최한 ‘빌링스 박사 선교 30주년 기념식’이 죽첨정 협성여자신학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 가을, 신학교 초청교수로 내한한 미국 드류신학교 농촌사역 전문가 펠턴(Ralph A. Felton) 교수를 정동선교부 사택에 1년동안 머물면서 강의와 연구를 하도록 후원했다. 그 사이빌링스 부부는 마지막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했다가 1938년 8월 귀환했다.
【1938년】
- 11월 4일, 조선호텔에서 주한외국인들의 친목단체인 ‘국제친선협회’가 열렸을 때 조선 총독이 직접 참석하여 ‘사해동포주의’를 내세우며 일본의 종교 및 교육 정책에 협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선교사 대표로 빌링스가 답사를 맡아 ‘내선일체’ 구호를 간단히 언급한 뒤 그보다 먼저 “동서 간의 화해와 일치가 중요하다”고 발언하였다.
【1939년】
- 신학교 교장직 사퇴 압력을 받았고 결국 1939년 4월 교장직을 변홍규 교수에게 넘겨주고 평교수로 강의만 하였다.
- 빌링스 부인은 1939년 9월 The Korea Mission Field에 “신학교 연줄(Seminary Contacts)”이란 글을 통해 당시 빌링스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얼마나 더 이곳에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하루하루 이 젊은 신학생들이 벅찬 과제이기는 하지만 반석 위에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돕는 데 열중하고 있다. 내일 당장 모든 선교사가 떠날지라도 한국교회는 무너지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다만 아직 이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곳에 좀 더 머물러 성실과 열심히 사역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
【1940년】
- 11월, 빌링스 부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 정부가 보낸 수성선 마리포사호를 타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잠시 거주했다가 필리핀 마닐라의 유니언신학교 교수로 파송을 받아 시무하였다.
【1942년】
- 필리핀이 일본군에 점령된 후 포로수용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1945년】
- 종전 후 귀국하였다.
【1946년】
- 기독교세계봉사회(CWS) 한국지부 책임자로 다시 나와 한국교회와 기독교기관 복구작업을 도왔다.
【1950년】
-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피난민과 전쟁이재민 구호사업을 하였다.
【1953년】
- 2월, 은퇴 후 귀국하였다.
【1969년】
- 1969년 3월 8일, 87세로 별세하여 힐로의 홈라니(Homelani)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기타】
- 1년 먼저 별세한 부인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다.
- 1921년 죽은 헬렌을 제외하고 4남매가 남았는데 평양에서 태어난 폴(Paul Bliss, 1912~1983)은 아버지 모교인 드포대학과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감리회 목사가 되어 캘리포니아에서 목회하였다.
- 딸 메리(Mary Louise, 1917~?)도 드포대학과 웨스턴리저브대학을 졸업한 후 클리블랜드에서 휴먼소사이어티 직원으로 사회봉사 활동을 하였다.
- 포티아(Portia Margaret, 1921~2011)는 스크립스대학과 캘리포니아대학을 졸업하였다.
- 앨리스(Alice Marie, 1925~2015)도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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