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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응 [鄭泰應, 1879~1957]
평신도, 성서공회 총무, 호는 송은
【1879년】
- 3월 16일, 경기도 용인군 석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20세 때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 이승만, 정교, 여운형, 주시경, 노병선, 오긍선, 최재학, 윤성열, 신흥우 등과 함께 1898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 학당을 졸업한 후 한때 교편도 잡았고 통신원 주사로도 근무하였다.
【1905년】
- 6월, 대영성서공회 한국지부 직원이 된 이후 평생을 성서공회 사업에 헌신하였다.
【1934년】
- 9월 19~20일, 제11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부회계에 피선되었다.
【1940년】
- 일제 말기에 접어들면서 당시까지만해도 선교사들에 의해 움직여지던 조선성서공회(대영성서공회로 1938년부터 개칭) 사업을 탐탁치 않게 여긴 일제는 1940년 9월 성서위원회에서 선교사들을 내몰고 한국ㆍ일본인으로 대체시켰다. 그리고 홉즈(T. Hobbes)와 협동총무로 선출된 정태응을 70일간 경찰서에 구금하기도 했다.
- 해방 직전에는 모함으로 총무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석유회사에 취직하여 생계를 꾸려나가기까지 하였다.
【1945년】
- 해방후 미군정청에 호소하여 적산으로 빼앗겼던 성서공회 건물을 되찾았고 미군정청으로부터 재산관리 및 기타 업무책임을 맡게 되어 중단되었던 성서공회 사업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 “대한성서공회의 재건”[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 대한성서공회에서는 그를 ‘장로’라고 호칭하는데, 어느 교회의 장로였는지는 알 수 없다.
【1947년】
- 무엇보다 재정의 자립이 필요함을 느껴 성서공회 재단법인 구성을 위해 노력한 결과 구한말 비서승(秘書承) 벼슬을 지낸 이풍한(李豐漢, 1885~1950)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그로부터 토지 30여만평을 기증받아 마침내 1947년 4월 「조선성서공회유지재단」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 이 재단 대표이사로 선출된 그는 그해 조선성서공회(후의 대한성서공회) 초대 총무로 피선되어 2년간 봉직하였다.
【1949년】
- 1월, 은퇴하였다.
- 은퇴후 고향인 용인에서 지내다가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 올라와 지냈다.
【1957년】
- 6월 15일 별세하였다.
- 대한성서공회는 그해 7월 20일 시흥군 과천에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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