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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문화는 14, 15세기를 지나는 동안 시종일관 혼란의 상태였다. 민족주의, 흑사병, 교회의 타락... 아비뇽의 유수... (416)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전의 세 사람의 개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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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유럽의 문화적 엘리트층 사이에 있었던 하나의 분위기였다... ‘인본주의’... 그러나 세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1천 년 동안 최고의 권위로 군림했던 인간성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관주의를 거부하며 인간의 문화적 독창성을 순수하게 믿는 것이었다.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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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오캄이 위대한 업적은 그가 유명론(唯名論)을 쇄신한 것을 들 수 있다. 유명론은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공의회수위설로 알려진 운동을 개혁하는 데 산파역을 하였다. 그것은 또한 마르틴 루터를 통하여 개신교의 신학이 탄생하도록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루터의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훈련은 거의 유명론적인 것이었다. (417-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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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의 명성은 그의 성경 번역작업 보다는 오히려 위대한 보헤미아의 개혁자 존 후스에게 영향을 끼친 교회와 구원에 관한 그의 개념에서 더 크게 알려졌다... 위클리프의 신학은 간접적으로 영국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루터에게도 영향을미친 것이다.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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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그의 “그리스도의 철학”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것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과 신학에 대한 그의 대안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부화한 알을 낳았다”는 말이 있었다. (418)
# 윌리엄 오캄과 유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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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됨... 이단자로 유죄판결...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가난을 이상으로 하는 급진적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단체를 지지했기 때문...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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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에 거주하면서 저술활동... ‘오캄의 면도날’... 설명의 경제적 규칙... “몇 가지 원리를 사용할 수 있을 때, (현상을 설명하는) 다수의 원리들을 사용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캄의 면도날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물에 대한 이중적인 원인을 가정하는 경향에 반대하는 역할을 하였다.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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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캄의 유명론... ‘개념론’... 극단적인 실재론에 반대하여 발전된 아벨라르두스의 이론을 반영하고 있다... “오캄은 모든 실재론의 표현형식들을 확실히 거부했다. 그리고 개별적인 대상의 직접적인 이해에 기초한 지식을 정초하였다.” (419-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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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역사가들은 근대적인 학문의 출처를 그에게로 돌린다. 그드른 근대에 이르는 과정(지식의 ‘근대화 과정’)을 말할 때, 오캄으로부터 시작하여, 코페르니쿠스를 거쳐, 갈릴레오, 케플러 그리고 뉴턴으로 이어져 왔다고들 한다.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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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로 인해 사망... 1349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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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향력은 교회의 교권제도에 의하여 편애를 받던 전통적인 실재론에 대한 환멸감과 함께 널리 퍼져나갔으며, 그리하여 교회의 높은 위신을 손상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그것은 교황에 의해서보다는 공의회에 의하여 교회를 다스리려고 하는 공의회 수위설을 고취시키고, 가속화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또 신앙과 이성 사이에 쐐개를 교묘하게 박아넣음으로서 신학을 편드는 스콜라적 방법의 지배를 잠식하였다.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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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캄이 이뤄낸 새로운 다른 혁신의 기초에는 그의 보편적 실재론이 깔려있다...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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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캄이 존재론적으로 보편적 실재를 거절하는 한 가지 이유는 보편적 실재를 믿는 신념이 소위 그의 “면도칼”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실재는 보편적인 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도 적절하게 묘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 실재는 불필요한 것이다. 그는 또한 실재론자들이 이해하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자기모순으로 여겼다.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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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캄의 보편적인 것에 대한 견해... 한때 그는 그것들을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것을 포함하는 단순한 허구로 여겼다... 보편적 실재들은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적인 개념들이다. 그러나 단지 정신 속에 있는 관념들이다.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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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캄의 유명론, 개념론... 1) 신앙과 이성 사이의 쐐기를 박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직접적인 신앙주의 또는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되는 ‘오직 신앙’으로 나아갔다. 2) 오캄의 철학과 신학은 하나님의 자연과 이성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였다. 3) 오캄의 사고는 교회론에서 종교회의의 제도를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42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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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실재적인 보편적 실재에 대한 오캄이 거절은 그로 하여금 자연 신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오캄은 하나님에 관한 오로지 단 하나의 진리만이 다만 이성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확립될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심지어 오로지 한 분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마저도 이성만으로는 결정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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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에 대한 거의 거절처럼, 오캄의 주정주의설은 200년 후의 루터에게 영향을 끼쳤다. 루터는 오캄을 영웅으로 부르며 환영했는데, 그것은 그가 스콜라 철학을 때려눕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확고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은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제한되거나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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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우위설은 파두아아 마르실리우스와 같은 그들 교회의 독실한 신자들을 말한다. 마르실리우스는 오캄의 유명론 즉 그의 교회에 관한 이론들과 그의 개인적인 것과 그들 자신의 윤리적인 판단에 초점을 맞춘 국가관과 결합되었던 사람이다. (426)
# 존 위클리프와 롤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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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는 보편적 실재에 관하여 실재론자였으나, 오캄과 같이 그는 교황이 부패하였다는 것을 믿었으며, 그리고 교회는 성직자들의 성직 계급제의 구조에 의해서보다 차라리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의하여 주관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었다. (426-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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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대학교에 있는 베일리얼 대학 학장... 교회 개혁을 거리낌없이 주장... 세속화과 권력과 돈에 사로잡힌 교황을 비난...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리가 된 화체설을 비판... (427-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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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는 화체설에 관해서 “현대적인 이단”이라고 부르면서, 그 대신의 것으로서, 성만찬에 관한 그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 그의 견해로는 떡과 포도주의 물질이 여전히 남아 있는 반면에 떡과 포도주는 남아 있으면서 떡과 포도주에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적인 임재’를 품도록 하기 위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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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실재적인 임재’라고 하는 그의 교리는 특별히 칼뱅의 성례관을 앞질러 미리 말한 것이다.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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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가 실재론자였을지라도, 그의 교회론은 몇 가지 점에서 오캄의 교회론에 집중되었다... 위클리프는 성직자의 급진적인 개혁을 주창했고 심지어 어느 정도 승인할 수 있는 형식으로 교황권 폐지까지 주장했다.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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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의 주요한 업적은 모든 신앙과 생활을 위한 성경의 최고 권위에 관한 그의 주장이다... “성경은 모든 기독교인을 위해서 최고의 권위이며, 신앙과 모든 인간의 완전한 규범”이라고 했다.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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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는 또한 구원에 관한 중세의 고해성사의 제도를 부인하였다.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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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그는 롤라드로 알려진 평신도 복음전도자와 설교자의 그룹을 조직... 롤라드는 영국에서 일어날 종교개혁을 위한 활동무대를 설치하는 데 도운 사람들이다.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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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영어로 번역... 보헤미아의 프라하... 개혁 설교자 존 후스... (431)
# 에라스무스와 기독교 인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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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적 학자들의 신학에 대한 대안... 16세기 중반의 개신교 종교개혁을 광신적 복음주의라고 생각한 데 대한 대안...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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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6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생... ‘공동생활의 형제’라고 부르는 개혁하는 신비적인 평신도들의 교단에 의해 운영되는 교회학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1492년 성직자로 서품을 받음... 인문주의 정신에 몰두... (43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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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의 필생의 꿈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분열하지 않고 개혁하는 것... 그의 ‘그리스도의 철학’은 실천적이며 평화로운 기독교의 영성을 예수의 모범에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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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언집』... 기독교 인문주의의 정신을 확실하게 반영한 재치있고 자극적인 사상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중세의 사회와 교회에 대한 미묘한 비판...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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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집』... 교회에 의하여 촉진된 대중적인 미신적 습관에다가 즐거운 농담을 불러일으키는 대화와 삽화로 된 총서...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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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람』(전투중에 있는 기독교인의 안내서, 1503년)... 기독교의 군인의 아내가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하여 간단하고 솔직한 해설을 요청... 르네상스의 가톨릭의 헌신적인 교훈의 고전... ‘영적 싸움의 무기들’(기도와 지식)... 초대 기독교 사상(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의 신학)의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영향을 반영...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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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행동의 찬양』... 중세 가톨릭의 외면적인 숭고한 모형과 대결하여 다투었다. 다시 말해서 성지 참배와 성인 순교자 등의 유골, 금욕주의, 수도원 생활, 고해 성사 그리고 교회의 성직 계급제의 구조 등에 대하여 언쟁을 한 것이다. (43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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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514년 그리스어 신약성경이다. “종교개혁에 이 저작물의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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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 전쟁을 비판하고 평화와 단일을 요구... 그는 루터를 약간 광신자로 여겼으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혁명자이며 그리고 그의 이단을 철회하도록 하는 황제와 교황의 명령들을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로 생각했다. 작센의 프리데릭에게 에라스무스가 루터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은밀히 전달한 적이 있다.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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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교 개혁자들을 거칠게 비난... 그것은 교회를 갈라놓는 것과 그 당시 계몽 정신과 부합하지 않는 광신적인 견해들을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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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와 은혜에 관해서 가르치는 루터의 교훈을 어이없는 그리고 광신적인 것으로 여겼다... 루터를 마니교라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신인협동적 구원론’...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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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의지와 속박에 관해서』라는 제목을 붙인 책을 가지고 대응했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의 독점적 사역의 구원론’을 다시 확인하고 에라스무스를 공공연한 펠라기우스 이단 아니라면, 반(半) 펠라기우스로 빠진 자라고 비난했다. (437-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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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소요리문답』, 『의지의 속박』... 평생을 통하여 가르친 그의 교훈의 대요... 그는 모든 종류의 ‘신인협동적 구원론’을 거부하고, 오직 복음적인 ‘하나님의 독점적 사역의 구원론’이 순수한 은혜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정당한 것으로서 신약성경의 구원 교리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확고히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의지만을 확언하고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께서 그것은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죄와 사탄에게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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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교회(현 성공회)는 에라스무스가 좋아한 양식으로 개신교의 가장 좋은 것과 로마 가톨릭 전통의 최선의 것과를 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