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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은 개신교 사상에서 형성된 것이며 개신교 사상은 울리히 츠빙글리와 존 칼뱅의 가르침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473)
# 개혁주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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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신학자들과 후기 모든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요한 세 가지 신학적 분야(구원론, 교회론, 성례전적 신학)에서 루터와 의견을 달리하였다. (474)
# 울리히 츠빙글리의 생애와 개혁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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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첫 세대인 루터와 츠빙글리 두 개혁자들은 칼뱅이 가졌던 놀라운 조직의 은사를 가지지 못하였다.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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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는 스위스의 글라우스에서 1484년 태어났다... 중상위층... 비엔나와 바젤에서 대학공부를 포함하여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았다... 바젤대학에서 석사학위(1506년)... 주임 사제...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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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년 에라스무스를 만남... 취리히... “국민의 사제”가 됨... (17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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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볼 때 츠빙글리와 그의 제자들은 “열광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적인 것들은 은 모두 벗겨 버렸기 때문이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적 임재도 부정하였고, 기념하는 식사로 의식을 축소시켰다...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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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년 스위스의 개신교와 가톨릭 지역 사이의 갈등... 취리히 시는 5개 가톨릭 지역과 싸우기 위하여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 제2의 카펠 전쟁에서 전사... (477)
# 츠빙글리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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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위한 궁극적인 권위이며 모든 인간의 전통을 완전히 능가하는 것이며 모든 인간의 전통은 성경에 의하여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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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권위를 강하게 호소함에도 불구하고 츠빙글리는 철학에 긍정적인 가치를 두었다... 인문학과 그리스 사상에 몰두하였다... 세네카...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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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라는 그의 책에서 자연과 역사를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실재로서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을 주장하는 자연신학으로부터 시작하였다.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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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성경을 근거로 하여 츠빙글리는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와 주권적인 통치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교리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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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는 피조물의 질서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단독사역론의 신앙을 거의 이교적인 결론으로까지 끌고 갔다. 다시 말해 그는 피조물 안에 어떤 독립적인 자기-결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현시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범신론과 같은 것을 주장... (479-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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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에게 예정은 두 가지, 즉 성경적인 교리와 하나님의 역할에 관한 독특한 견해이다.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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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적으로 규정하고 복음과 율법을 대립시킨 반면, 츠빙글리는 율법과 복음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며 상호보완적인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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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로부터 나온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나타내신 율법에 대한 순종의 하나로 성화와 제자로서의 생활을 강조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나 루터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츠빙글리와 칼뱅이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한다고 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구원의 복음의 중대성을 결코 경감시키지는 않았다. (481)
# 성례에 관한 츠빙글리와 루터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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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에게 소위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들은 은혜의 실질적인 수단보다는 오히려 상징적인 의식들(나중에 “성찬식”)이었다... 성례 또는 성찬식은 신적 실재의 표시 또는 상징이다.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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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는 세례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옛 언약으로서의 할례와 동등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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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는 어린아이가 아담의 죄에 대한 죄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는 원죄를 타락과 부패 그리고 사망의 유전적인 질병으로 보았다. 어린아이가 죄책을 지지 않는 것은 아담의 모든 후손을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아담의 죄책을 말끔히 씻었기 때문이다.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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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는 화체설 거부... 그리스도가 다시 희생의 제물이 된다고 하는 “재희생설”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몸은 지역적으로 천국에 제한되어 있으며 편재하지 않는다... 기념... (484)
# 존 칼뱅의 생애와 개혁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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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노용 근처에서 1509년 7월 10일 태어나 스위스 제네바에서 1564년 5월 27일에 사망하였다.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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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John Knox, 1514-1572)는 스위스 도시를 모범으로 스코틀랜드를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자이다. 녹스는 칼뱅과 그의 후계자 테오도레 베자의 지도 아래 있는 제네바와 그 대학을 가리켜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선언하였다.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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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문화에서 그리고 특별히 그의 신학이 지배했던 국가교회, 즉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와 같은 나라에서도 그는 신학 외에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 윤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칼뱅은 오를레앙과 파리에서 법률, 철학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였다.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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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있는 개신교에 대해 박해가 일어났을 때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 『기독교강요』 초판... 1536년... 25세... “종교개혁의 중심적인 교리에 참된 교의적 형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교리들을 기독교 신앙의 고전적인 사상 중의 하나로 집약시켰다.”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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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지도자 기욤 파렐... 제네바에 머물도록 설득... 칼뱅의 제네바는 “경건한 도시”로 변해갔다... 성경의 율법에 근거한 엄격한 생활양식이 그 도시에 부과되었다.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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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세르베투스... 화형... (488)
# 칼뱅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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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기 위하여 자연신학을 거부하고 성령에 의하여 영감을 받고 조명된 성경을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위한 오직 최고의 권위로 승격시켰다... 성령의 내적 증거인 특별한 조명이 없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성령의 내적 증거는 택함을 받은 자들이 중생(거듭남)할 때에만 그들에게 주어진다. 교리적인 논의와 신앙은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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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관한 칼뱅의 교리는 철저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교의를 따르고 있다... 우연적인 것을 부인...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일어나는 모든 것을 사랑과 긍휼 또는 공의와 조화시키지 못할지라도, 발생하는 모든 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였다.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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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중예정론의 신앙을 흔히 칼뱅주의라고 부르며 그것을 칼뱅신학의 중심원리이며, 최대의 공헌으로 생각한다.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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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의지...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과 용서를 베푸시는 것... 은밀한 의지... 어떤 사람들에게 영원한 저주를 예정해 놓으시고, 그들이 죄를 범하고도 결코 회개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 “인간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리는 자들은 부당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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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에 관하여서는 츠빙글리와 의견을 같이 한 반면 그는 성만찬에 관한 츠빙글리의 신학과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실재적인 육체적 임재가 없는 기념 식사로만 보았다. 그러나 칼뱅은 실재적인 임재에 관한 설명에서 가톨릭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설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칼뱅은 츠빙글리에 반대하여 루터와 같이 성만찬의 성례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적인 임재를 주장하였다... “우리를 위한 (실재적 임재의) 방법은 영적인 것이다.” (490-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