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육 94』(2005.6), 117-150.
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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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칼슈타트의 갈등... 칼슈타트는 비텐베르크 운동의 정점기에 형상파괴를 설교하였다.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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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소요’ 사태를 진정시켰다. 일련의 논쟁이 오간 후 급기야 1525년 루터는 칼슈타트를 ‘우리의 가장 나쁜 적’이라고 불렀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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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 비텐베르크 형상파괴운동은 종교개혁의 원리 즉 복음을 지키려는 순수한 교리적 차원에서 수행된 결과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다보니 루터와 칼슈타트의 가라짐에 초점을 맞추어진행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지나치게 미사 개혁에 대한 입장 차이에만 두어졌다. 두 사람의 사상과 정치권력과의 관계는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다. 또한 최근 종교개혁기의 형상파괴운동은 개인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도 전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방적인 현상이라는 주장들도 제기되었다. 또한 흔히 이야기되듯 종교가 정치의 방향을 전적으로 좌우했던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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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인간과 세계의 재발견이라 할 만한 업적을 남겨놓았다. 이에 비해 종교개혁은 어떠한 매개도 없는 하느님과의 직접적 교류를 통한 ‘개인의 발견’에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곳곳에서 일어났던 형상파괴가 말해주듯 반예술적 행태도 보여주었다. (118-119)
2. 칼슈타트의 성상파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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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슈타트는 종교개혁자 중 최초로 로마 가톨릭을 ‘우상적’이라고 공격하였다. 또한 그는 처음으로 중세 신앙이 잘못되었으며 악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또한 가톨릭 예식을 정화하려는 계획을 입안하였다. 그 정점에 성상파괴주의가 있다. (1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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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슈타트의 성상파괴주의는 1516년 초, 요한복음 6:63의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무익하다”라는 복음에서 기초하여 ‘외적신앙’을 공격한 데서 그 싹을 볼 수 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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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슈타트는 물질적 요소가 영적 은혜를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질적 요소는 여행자가목적지로 가는 길 표시를 하듯 손바닥에 표시하는 것과 같이 예배자를 더 높은 영적 실체로 인도해 주는 표식일 따름이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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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슈타트는 1521년 6월 『맹세에 관한 지침』에서 형상숭배를 계속 비난하였다... 형상은 종교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것은 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내적 형상이 되어 속인의 지적, 영적 성장을 지체시킬 뿐만 아니라 그릇된 예배로 잘못 인도하기까지 한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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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년 1월, 『형상폐기론』... 종교개혁 이래 그가 제시했던 성상파괴론의 집약... 종교 형상에 관한 가장 중요한 논문이자 프로테스탄트의 ‘형상 신학’ 발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무식자들을 위해 독일어로...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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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파괴 설교의 신학적 근거는 성서이다.... 1) 첫 부분은 성서의 형상금지에 초점을 맞춘다. 즉 칼슈타트는 하느님이 모든 종교적 형상을 금지했다고 주장한다... 십계명... 종교개혁 직전까지 가톨릭교회는 제도가 가하는 강제력과 ‘하느님의 현현’이라는 신학적 논리로 형상 옹호에 대한 이론을 정교화 시켜 나갔다. 신학적으로 형상이 제거되면 그리스도론에 치명적 손상이 가해진다고 생각했다. 회화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은 예수가 순수한 인간임을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형상숭배의 교리적 핵심은 성육신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점과 하느님이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났다는 중요한 교리에 의해서 회화예술을 옹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칼슈타트의 성서해석... ‘문자적 성서해석’과 ‘자유적 성서해석’... 칼슈타트는 ‘문자적 성서해석’을 극단적으로 적용하려고 하였다... 2) 칼슈타트는 형상에 작동하는 교권주의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가톨릭의 주장은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가련한 자의 교과서』였다... 칼슈타트는 그러한 주장 뒤에 교권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교권주의란 교회의 권위가 극대화되어 교회를 통해서만 초월자를 만날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중세에 강화된 교권주의는 교회의 힘을 절대화함으로써 오히려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를 인간이 만든 사회제도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므로 교권주의는 오히려 종교적 가치의 세속화를 의미할 수도 있다... 초월적 경험을 교회에서만 가능한 경험으로 왜곡시키면서 초월적 가치 자체가 지워지고 사라진다... 종교개혁은 사라져가는 초월적 가치의 회복을 위한 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칼슈타트는 형상이 가련한(가난한) 자를 위하기는커녕 오히려 속인이 사제에게 계속 의존하게 할 뿐이라고 비난한다. 형상이 있기에 계속 무식한 상태로 내팽겨져 있다... 3) 칼슈타트는 신학적 차원에서 영ㆍ육 이원론을 제시한다. “영적 영성은 형상을 통해 접근할 수 없다. 즉 유한자는 무한자를 파악할 수 없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이다. 즉 물질은 영적 가치를 전달할 수 없다... 유태교와 같이 형상 개념을 우상 개념에 포함시킨다(유태교적 근본주의). (1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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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슈타트의 성상파괴론은 1517년 시작된 일련이 종교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그는 예배의 외적 형식도 분명히 복음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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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4년 루터의 귀환과 반박... 자기 행동을 모세의 율법을 복원시켰던 이스라엘 요시아 왕의 개혁에 비유... 요시아 왕의 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바로 형상을 파괴하는 것... (126)
3. 루터와 성상파괴주의
1) 신학적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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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형상에 관한 ‘외부 신학’은 일관되지 못함이 지적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예배 의식에 대한 칼슈타트의 공격에 반응하여 루터의 신학이 발전한 것이었다.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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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에 대한 루터의 처음 입장은 회의적... 「로마서 강의」(1515-16)에서 그는 사치스런 교회장식과 교회장식에 드는 비용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예배용 물건을 ‘단지 그림자이자 실체의 표식’일뿐이거나 ‘유치한 것’이라고 보았다.... 형상파괴론을 옹호...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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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년 3월을 지나면서 루터의 입장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비텐베르크 개혁이 폭동과 소요로 점철된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 「사순절 첫 주일 설교」... 1) 칼슈타트의 예배와 형상파괴 정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강력히 비판, 2) 루터의 예배 형식관이 중립적으로 바뀌어 갔다. 3) 선제후의 적극적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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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년까지 루터와 칼슈타트에게 신학적 관점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신학적 불일치는 없다. 이 시기까지 두 사람이 형상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된 근본적 문제는 종교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1525년 농민전쟁을 겪으면서 확연히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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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4년 루터는 「천상의 예언자에 대한 반론」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칼슈타트에 대한 루터의 총체적 반격의 글... 1) 루터도 칼슈타트와 같이 중요한 정책을 구사하였다. 즉 그는 칼슈타트의 「형상폐기론」과 마찬가지로 하층계급과 무학자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려고 의도적으로 독일어로 썼다. 2) 루터의 ‘외적 신학’이 구체화되었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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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영혼ㆍ물질 이원론을 배격한다. 영의 반대는 ‘몸’이 아니고 ‘육’이며, 그것도 우리들의 신체적인 측면이 아니고 자아의존 혹은 우리들의 반항성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은 신체적인 것을 통해 우리들에게 온다. 역으로 내적 경험은 외적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고 이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은 외적인 것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내적인 것을 주기로 작정하지 않으신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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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카톨릭이 화체설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사 중의 희생에 관한 강조에 대해 반대한다... 다른 한편 하느님에게 대한 모든 의식의 형식을다 폐지하자는 광란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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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문제는 종교개혁의 결속을 와해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루터와 칼슈타트, 루터와 츠빙글리의 갈라짐은 그 대표적 예이다.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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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지금 사용되고 있는 혐오스러운 것들은 깨끗이 정화될 필요가 있음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이런 형식들을 폐지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들을 경건하게 사용하자고 강조한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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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칼슈타트에 대해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우상의 의미, 둘째 성서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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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에게 ‘우상’이란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을 절대화하고 신격화하여 그 대상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神像이나 종교적 상징물보다는 보이지 않는 절대적 가치나 힘들이다. ‘형상’과 ‘원형’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성서가 금하는 것은 단지 하느님의 형상이다. 물론 하느님의 형상을 예배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칼슈타트는 이를 혼동하여 십자가나 성자의 형상조차 부수려 한다... 성서는 하느님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자연법 안에 나타나 있고 시민법적인 제도, 즉 가족과 국가 같은 것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자연법은 하느님의 의지를 계시해 주는 적극적인 표현이다. 율법은 2개의 주된 기능을 갖는다. 하나는 시민법으로서 악한 자를 억제시키고 사회생활과 복음전파에 필요한 질서를 제공해 준다.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법으로서 인간의 죄와 가공성을 깨닫게 해준다... 모세의 법은 제대로 해석된다면 십자가나 성인의 형상을 금하지는 않는다... 루터에 의하면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뱀 역시 하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형상의 창작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의 경배를 금하는 것이다. 형상 금지의 문자적 적용은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율법으로 만들고 동시에 신앙을 의식화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루터와 칼슈타트의 성서해석의 차이는 사회질서 유지의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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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칼슈타트) 양측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적들이다. 교황은 명령을 통해, 칼슈타트 박사는 금지를 통해 이 자유를 파괴한다. 교황은 행해야 할 바를 명하고 칼슈타트 박사는 행해서는 안될 바를 명한다.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파괴된다... 한편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명하지 않는데도 그렇게 행할 것(즉 성서적 근거가 결여된 교황의 새로운 전통들)을 명할 때, 다른 한편은 하느님께서 막지도 금하지도 않은 것들을 막을 때 (즉 중립적인 종교적 관행들에 대한 칼슈타트의 거부) 그러하다. (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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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슈타트의 성상파괴론은 종교적 공로로 영적 복락을 보증하는 행위로서 ‘오직 신앙’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루터는 정작 예배의 본질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려에 대한 칼슈타트의 핵심을 은근슬쩍 비켜가고 있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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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성서는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성서를 권위있게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다... 성서해석상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은 두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1) 요리문답적 접근, 2) 정치적 해석학적 접근이다.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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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은 사실상 누가 성서를 해석할 권위를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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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은 처음에는 모든 개인이 성서를 해석할 권위를 갖고 있음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세속 정부의 지원을 받은 관계로, 얼마 못가 이러한 이념이 초래하게 될 사회적 정치적 파장들에 관해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1525년의 농민전쟁은 루터 등으로 하여금 개개 신자들은 결코 성서를 해석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확신시키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중세 이래 교황과 공의회에게 부여되었던 성서해석이 루터나 칼뱅 등 권력을 가진 몇몇에게로 확대된 것일 따름이었다. (13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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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대한 루터의 태도는 분명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이같은 태도에 대해 그가 비단 사상가일 뿐 아니라 목회자였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135)
2) 사회적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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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칼슈타트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것은 ‘권위’의 문제였다... 루터가 이른 시기부터 세속 정부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 루터는 당국의 협력없이 개혁 조치들이 도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13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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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것은 성직자들에게, 정치ㆍ사회적인 것은 당국자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른바 두 왕국론... 두 정부에 대한 루터의 생각은 칼슈타트와의 논쟁을 통해 확고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524~5년 「천상의 예언자에 대한 반론」에서 형상의 제거는 일반 민중이 주도할 것이 아니라 당국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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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칼슈타트의 영성주의로 인한 형상파괴행위와 독일 농민전쟁은 상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무정부 상태를 유발한 것이다. (139)
4. 비텐베르크 성상파괴 논쟁의 정치적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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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대체로 종교개혁자들이 제기한 전통적인 종교적 관행들의 문제점 및 폐지 요구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종교개혁이 효과적으로 확립되고 나서도 법과 질서를 내세웠다.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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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선제후 때문에 비텐베르크에서의 종교개혁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추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선제후는 가능한 한 민중의 합의 하에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종교개혁을 진행할 것을 루터에게 강력히 권고하였고, 루터가 순순히 이 명령에 따랐던 사실은 이러한 추론이 타당함을 입증해 준다.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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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의 영주들은 일종의 점진적 개혁을 통한 체제 유지를 선택한 것이다... 선제후는 ‘사회질서의 옹호자’ 루터의 손을 들어주었다... 1524년 루터는 비텐베르크 운동 내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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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슈타트는 영주들에게 호의적이 되도록 애를 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520년대 칼슈타트는 루터와의 정치적 싸움에서 패배했던 것이다... 그의 사상은 17세기 독일 경건주의와 바다를 건너 영국 나아가 미국의 감리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성사파괴론과 관련한 근본주의적 성서 해석은 영국 청교도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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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사회질서와 권위 옹호’는 당시 독일을 휩쓸었던 1525년 독일 농민전쟁이라는 대폭풍의 순풍을 받아 영주권의 지지를 획득한 원동력이었다... 비텐베르크 운동의 성상파괴논쟁의 추이를 통해서 볼 때 종교개혁은 정치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던 것이었다. (146)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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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년 11월에서 1522년 1월에 걸쳐 진행된 비텐베르크의 형상파괴운동은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의 일환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 내부의 갈등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칼슈타트와 루터의 신학적 차이는 루터사상의 변화라기보다는 시대상황에 따른 루터의 정치력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칼슈타트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 루터는 성서의 자유적 해석을 취하였다. (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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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형상파괴 논쟁은 정치적 맥락이 중시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주도권 싸움... 최종 승리는 제후 편에 섰던 루터였다... 루터는 세속 권위의 인정과 사회 질서 유지를 내걸므로써 비텐베르크 당국 나아가 작센 선제후와 제후들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어 나갔다... 제후 입장에서 볼 때, 작센 제후들은 루터를 지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권을 공고히 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을 지원함으로써 카톨릭과 그 배후에 있는 황제권력과 로마 교황청의 권력으로부터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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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형상파괴운동은 프로테스탄트에게 ‘상징의 우상화’를 염려한 나머지 지나치게 종교적 상징들을 약화시키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설교 중심의 예배를 가져오게 할 단초를 제공하였다.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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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형상파괴논쟁은 구상미술의 우상숭배 논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당시 사회에 존재하는 다른 우상들과 씨름하는 흔적이 별로 없다... 루터는 말할 나위 없고 칼슈타트의 경우에서조차도 정치적, 사회적 우상들에 대한 고민한 흔적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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