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중(신부, 광주가톨릭대학교 교회사 교수)
『신학전망 124』(1999), 100-117
I.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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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는 필요성은 초기교회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곧 제창되어왔다.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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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고, 이 분열을 치유하려는 운동이 1522-1648년 사이에 가톨릭교회에서 더욱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이 당시의 가톨릭개혁을 19세기 초 역사가들은 관점에 따라서 ‘가톨릭개혁 운동’, ‘가톨릭쇄신 운동’ 또는 ‘반종교개혁’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101)
II. ‘가톨릭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차이
1. ‘반종교개혁’ 표현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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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퓨터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이미 받아들인 지역을 가톨릭교회 신앙으로 회복시킨다는 의미에서 처음으로 ‘반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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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저자인 케커는 프로테스탄트개혁과의 혼동을 피하고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1859년 「가톨릭개혁」이라는 글로 소위 반종교개혁에 대한 그의 주장을 발표하였다.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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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터(Moritz Ritter)는 1876년 처음으로 대학에서 ‘반종교개혁’이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 (102)
2. ‘가톨릭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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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프로테스탄트 학자인 마우렌브레허는 「가톨릭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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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플러는 중세 초기 개혁가들의 사상이 15세기 내내 지속되었고 걸식 수도회와 성인들의 모범적인 삶의 영향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인정하였다.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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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케(Leopold von Ranke)는 반종교개혁이라는 용어로 16-17세기 프로테스탄트 우동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반작용을 단순하게 부정적인 의미로 평가 절하했는데,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역사가들에 의해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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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바의 가타리나 성녀(Catharina, 1447-1510)와 그의 영향을 받은 베르낫쟈(Ettore Vernazza, 13470-1524) 등 열심한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성직자와 협력하여 1497년에 찿설된 神愛會(신애회)는 초기 개혁자들 중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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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신운동은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 아빌라의 데레사(1515-1582), 밀라노의 가롤로 보르메오(1538-1584) 등 수많은 성인들에게까지 이어졌는데 그들의 거룩한 생활과 신비적인 내용의 저서들도 당시 프로테스탄트교회가 가톨릭교회와 투쟁을 일으킨 동기와 연관된 것은 아니었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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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개혁을 부르짖었던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며, 소위 반종교개혁 운동으로 표현된 가톨릭개혁의 기원은 루터와는 별도로 시작되었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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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스또르(1854-1928)가 ‘가톨릭개혁’이라는 이 용어를 널리 유포한 이후, 특히 가톨릭학자들은 ‘반종교개혁’이라는 용어 대신 주로 ‘가톨릭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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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종교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생겨난 운동으로서 반가톨릭적인 개혁 운동의 확산을 막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히 하며 정치적으로도 결속을 견고히 할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영향력과 失地 회복을 도모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104)
3. 독일의 반종교개혁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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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타도를 위해 설립되었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독일의 루터파나 라틴계 칼빈파에 대항한 가장 강력한 중심세력이 되었다. 남부와 서부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약화되고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간 지역이 가톨릭교회로 되돌아온 것은 주로 예수회의 적극적인 활동 덕택이었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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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2의 사도로 추앙받고 있는 베드로 까니시오(1521-1597)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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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을 인정한 세속 영주... 1564년 바이에른의 알프레흐트 공작(1550-1579)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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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평신도 제후들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확산은 정치적, 종교적 갈등과 투쟁을 야기하였다. (105)
III. 시대적 상황
1. 정치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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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개혁파는 자기네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잔인한 반역과 살인적 폭군까지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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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대 중엽 서유럽 인구를 6천만명으로 추산한다면 이 가운데 1/3인 2천만명 정도가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갔을 것으로 본다. 특히 1555년 9월 25일 아욱스부르그 종교화의에서 ‘영주의 종교는 그 국민의 종교’(Cujus regio, eius religio)라는 원칙이 결정되면서 독일에서는 종교 분포의 지리적인 분계가 더욱 확실해졌다. (106)
2. 경제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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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개혁이 근대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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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Weber)와 트롤츠(Troeltsch)에 의하면 칼빈이 개개인의 임무에 최선을 다 하도록 권고하며 노동으로 얻어진 결실의 낭비를 자제하면서 자본을 축적하도록 독려하였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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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적인 배타적 사유재산권은 가톨릭 정신에 어긋난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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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초기와는 달리 후기에 와서는 지상의 경제적인 성공과 하느님의 축복, 즉 구원과 연계시켰지만 가톨릭의 가르침은 이 양자를 연계시키지 않았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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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와 판파니는 가톨릭이 다양한 계층간에 조화를 이루도록 중재하고 덜 가진자를 옹호하면서 도덕적인 틀안에서 경제적인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는 한편, 프로테스탄트는 부의 지배를 부추기며 경제활동에 있어서 모든 족쇄를 제거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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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인 성공을 이루는 것이 하느님 축복의 증거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107)
3. 가톨릭교회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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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교황들도 교회의 쇄신을 시도하였지만 전반적으로 미진하였다. ‘머리의 개혁’은 당시의 정략적인 국제정치의 영향 때문에 교황직이 불안정하여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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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스페인, 프랑스에서도 신앙생활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성인들과 영성작가들, 평신도, 성직자들이 배출되어 교회 쇄신에 전력 투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전부터 시작한 교회의 쇄신운동을 더욱 활성화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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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교회가 로마로부터 결별한 이후 국가에 예속되었듯이, 프로테스탄트도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면서 교회를 국가에 예속케 하여 국가교회와 국가주의를 형성케 하였고, 이로 인해 독일국가들과 라틴국가들 사이에 적대감을 유발케 하였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로마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종교개혁을 추진한 것처럼 드러냈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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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에서는 개인고백이나 성체성사를 통하여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는 이러한 도움을 무가치하게 생각하고 폐기하였다. (108)
IV. 가톨릭개혁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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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 교회 쇄신을 위한 열망... 교회 당국에 대항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회개와 쇄신에 전념함으로써 교회쇄신을 위한 누룩과 같은 공헌을 하였고... 새로운 수도회가 창설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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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성을 보존한 수도회... 절대적 침묵을 지키며 기도와 명상으로 수도생활에 전념한 ‘카르투시오회 회원들은 개혁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변질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수도자들의 기도와 증거의 삶이 교회쇄신의 보이지 않는 누룩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109)
1. 다양한 평신도 단체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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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바의 가타리나 성녀의 영향과 평신도인 베르낫쟈의 활약으로 신애회가 1497년 12월 26일에 창설되었다. 이 단체는 사도직 활동과 애덕활동에 있어서 내적생활을 선도하는 데 새로운 기원을 이루었고 루터의 개혁과는 전혀 독립적으로 시작되어 트리엔트 공의회의 선구적인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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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덕활동은 1495-1496년 사이에 창궐했던 페스트 전염병이나 자연 재해로 말미암아 긴급한 구호활동을 필요로 한 시대의 필요에 대응한 것이었다.... 가예따노(1480-1547)와 까라파(1476-1559), 그리고 베로나의 주교인 지베르티도 애덕활동에 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의 사목활동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교회개혁의 모범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10)
2. 옛 수도회들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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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돌리회는 로무알도 성인(950-1027)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창설... 바울로 쥬스티니아(1476-1528)의 주도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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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라수도회 등 수도원의 개혁... 1800년대의 여러 역사가들이 쓴 ‘수도생활이 전반적으로 쇠퇴했다’라는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111)
3. 새로운 수도회의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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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수도회의 필요성 자각... 당시 교회에서 인정된 옛 수도생활의 관행과 형식으로부터의 탈피하는 모험을 감행.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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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따노(제2의 아씨시 프란치스코)... 테아티노회 창설 (111-112)
4. 교구 주교들의 개혁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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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의 주교들도 교구 공의회를 소집하고 가톨릭 신앙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신앙쇄신을 위한 설교를 독려하며 성직자 양성에 각별히 배려하였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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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로나의 지베르띠 주교도 교회 쇄신에 전념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성직자의 지적인 수준을 향상시키고 영성을 심화시키는 것에 관심...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결국은 성직자의 자질에 비례한다고 생각... ‘무익한 많은 숫자보다 좋은 사람의 소수가 더 좋다’ (112-113)
5. 교황청의 개혁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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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은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였지만 그 전 시대에 교회를 크게 위협했던 공의회 수위설에 대한 염려 때문에 여러 계층에서 요청한 개혁에 대해 즉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해 하였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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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와 수도자들에 의해서 꾸준하게 추진되던 교회의 쇄신 운동이 체계화되어 전체 교회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14)
V.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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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쇄신 운동이 전체 교회에 확산된 전반적인 운동이었다면 반종교개혁 운동은 특정지역의 한정된 분야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볼 수 있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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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쇄신해 나갈 수 있는 자극제가 되었으며 가톨릭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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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개혁 운동 이전과 진행과정에서,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되었던 가톨릭쇄신 운동과 반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이미 교회에 내재된 기본적인 힘과 트리엔트 공의회의 쇄신 운동 및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수도회의 활동 등이 없었더라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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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의 쇄신 (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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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생활쇄신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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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알고 그 시대의 필요에 봉사할 수 있을 때 교회와 수도생활의 쇄신이 활성돠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아닌가 생각한다.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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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많은 숫자보다 좋은 소수가 더 좋다”는 지베르띠 주교의 성직자 양성 기본원칙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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