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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 조동걸(趙東杰)
제5장 : 중기(1919~1931)의 독립운동
[제1절] 1920년대의 독립운동단체
- 1920년대의 민족운동 조직 가운데서 비밀지하단체만을 대상으로 검토하면, 임시정부ㆍ재만독립군ㆍ대한국민회ㆍ여성단체 등의 네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149)
- 임시정부 계열조직은 주비단ㆍ숭의단ㆍ농민단ㆍ의용단ㆍ진명단ㆍ신민단ㆍ결사대 등이 있었다.... (149)
- 재만독립군계열은 사천청년회ㆍ용만청년회ㆍ해동청년회ㆍ의용대ㆍ자유회뿐인데 만주는 인접하기 때문에 독립군 조직원이 직접 파견되어있어 국내에서 독자 조직은 발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외에 해외독립운동을 주로 재정이나 선전활동으로 지원한 지하조직으로 비현청년단ㆍ대한민회ㆍ구민단ㆍ청년단ㆍ백마당ㆍ애국청년단ㆍ국민회ㆍ전도회ㆍ대한민국회 등이 있었다. 노선은 무장조직보다는 온건한 편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150)
- 대한국민회계열은 국민회ㆍ향촌회ㆍ활동단 등의 명의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1920년 또는 1921년에 거의 발각되고 말았다. (150)
- 지하 여성단체는 부인회ㆍ여자구락부ㆍ결백단... 그 외에 용골단ㆍ건국단ㆍ일심단ㆍ용진단ㆍ중흥단ㆍ결의단ㆍ혈성단 등 자료에 부명한 성격이 밝혀져 있지 않은 지하단체... (150)
- 1920년에는 일제의 탄압이 가중된 이유 등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인 아닌 지방별 행동 조직이 확산된 것으로 변천하였다. (150)
- 봉건주의 항일단체가 없었다는 점... 근대적 민족지성이 크게 앙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151)
[제2절] 임시정부 수립과 활동
- 세계적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사례는 1911년 몽골임시정부, 1917년의 러시아ㆍ폴란드ㆍ핀란등의 임시정부가 한국임시정부의 선례이다. 1917년에는 신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ㆍ홍명희ㆍ김규식ㆍ조소앙 등의 한국 독립운동자들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계획하여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52)
- 1919년 9월에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통합정부 수립... 자유주의 이념과 공화주의 정부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사실... 통합정부를 수립할 때 만든 헌법이 당장에 급하지도 않은 삼권분립까지 표방한 민주주의의 이상을 나타낸 것은 정식정부를 예사한 준비정부로서 만전을 기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식정부 수립이 요원해지자 임시정부의 헌법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조항만 두게 되었다. 그것이 1925년과 1927년의 헌법이다. 그후 1941년 중경에 정착하면서 만든 헌법에 이어 1944년의 헌법에서는 광복을 전망하면서 다시 준비정부로서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그것은 권력구조를 나타낸 정부형태의 변화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53)
- 독립운동의 시기구분... 임시정부가 머물렀던 곳에 따라 상해시기(1919-1932), 이동시기(1932-1940), 중경시기(1940-1945)로 나누는 것... (153)
- 임시정부는 1919년 준비정부로 탄생했기 때문에 정식정부의 수립 준비를 위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외교에 집중하는 한편, 각종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였다. (153)
-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의 외교적 쟁취가 무산되고 1920년 청산리전쟁에 이은 경신참변 등으로 독립전쟁이 크게 타격을 입은 뒤에 준비정부로서의 임시정부 성격은 희석되고 말았다. 1920년 말 대통령 이승만이 상해에 도임하여 분란만 일으킨 것을 고비로 준비정부의 위치는 상실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독립운동 전체를 재정비하려고 1921년부터 국민대표회 소집이 제기되었다. 박은식ㆍ원세훈ㆍ안창호ㆍ김동삼 등이 국민대표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1923년 1월 3일부터 5월 15일까지 상해에서 국민대표회가 열렸다... 임시정부의 보존(이승만, 이시영), 개조(안창호, 김동삼, 여운형)와 창조(김규식, 김응섭, 윤해)의 주장이 대립하여 회의는 실패하였다. (154)
-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통령 이승만의 비정상적 운영 때문에 임시정부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여 1923년에는 대통령불신임안을 결의... 그래도 이승만이 물러나지 않자 1925년에 대통령탄핵안을 통과시켜 그를 축출하고 뒤이어 박은식을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1925년 국무령을 중심한 내각책임제 개헌... 새 헌법에 따라 안창호, 양기탁, 이상룡, 홍진, 김구 등이 차례로 국무령에 선임... (155)
- 1924년부터 국민위원회 인사들이 추진하던 민족대당운동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1926년부터는 임시정부 안팎에서 민족대당 결성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때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가 민족대당을 임시정부 위의 최고기관으로 한 이당공작 체제의 헌법을 만드니 이것이 1927년의 국무위원회 중심의 관리정부형태의 헌법이다. (155-156)
- 1) 민족대당운동을 계기로 정당 결성운동이 일어났다... 1924~5년 만주에서 한족노동당과 고려혁명당이 탄생한 후, 1930년부터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혁명당이 결성됐다는 것을 말한다... 2) 결과론이기니 하지만 정부를 관리정부 형태로 개편하므로써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이동기의 임시정부를 운영하기에 편리했다... (156)
- 임시정부의 생기를 찾았던 것이 한인애국단이 주도한 1932년의 이봉창의 동경의거와 윤봉길의 상해의거였다. 이러한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의의 경종인 동시에 세계 제국주의에 대한 경종이었다. 그리고 한국독립운동이 새롭게 활기를 찾는 쾌거이기도 했다. (156)
- 한국독립운동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그 임시정부는 한국사에서 볼 때 혁명적으로 추구한 자유주의 이념과 공화주의 정치를 표방하여 한국근대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독립군이나 임시정부는 식민지 무효론의 역사적 근거이며 절대독립의 민족적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자가 해방 조국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은 역사의 순리였다... 독립군이나 임시정부가 식민지 무효론을 주장하고 절대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 해방 후 한국이 독립할 엄연한 근거가 있는 것이고 또 일본에 배상금을 청구할 근거가 있는 것이다... 해방 후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인은 그러한 역사성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특히 군사정권은 1965년 한일협정에서 배상금을 포기한 민족적 과오를 저질렀다. (157)
- 식민지하에 있던 약소민족은 해방운동의 논리를 자유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어디에서 찾더라도 그의 전단계로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때의 민족주의는 세계주의로 가는 중간 단계의 이념이기 때문에 국수주의와 구별됐다. 그러한 이치를 외면하고 직접 세계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선전선동한 공산주의 노선이 있었다. 그것이 한때의 독립운동을 혼돈에 빠뜨렸는데 깊이 반성할 문제이다. (158)
- 1920년대가 깊어가면서 자치론이나 타협론은 독립운동에서 탈락해 갔다. 그리하여 1930년대가 되면 사회운동이나 독립운동도 새롭게 정비되어 갔다. (158)
[제3절] 재만독립전쟁의 전개와 특징
[1] 재만독립운동의 전개
- 만주나 간도라는 호칭... (160)
- 만주라는 호칭... 『택리지』 평안도조에 나온 것을 보면, 늦어도 조선시대부터는 사용해온 지명... 1932년에 일제의 괴뢰로 건립한 만주국 때문에 중국인은 지금도 만주라는 호칭을 기피... 간도란 지금의 연변자치주 지방을 말하는데 한국과는 역사적으로 국경분쟁이 있었던 지명... 그러므로 중국인은 간도라는 호칭 사용을 백안시... (160)
- 1921~1933년까지는 러시아에서 흑하사변을 겪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 독립전선을 개편하는 가운데 참의부ㆍ정의부ㆍ신민부의 3부로 정비하여 민정과 군정 이원체제로 동포사회를 관활하던 시기... 유일당 운동을 맞아서는 삼부를 통합, 국민부와 한족총회로 개편... 괴뢰 만주국에 대해서는 민족진영의 조선혁명군(국민부)과 한국독립군(한족총회)이 공산진영의 유격대와 손잡고 중국구국군과 연합작전으로 반만항일전쟁을 폈는데 1933년 한국독립군은 관내로 이동하고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되기 시작한 시기... (161)
- 1993~1945년까지는 중공 만주성위원회의 반민생단투쟁으로 동북인민혁명군과 통일전선을 펴고 있는 한국 독립운동이 크게 타격을 입은 시기... 동북항일련군으로 개편되면서 새롭게 발전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때 조국광복회가 결성되고 보천보전투의 기록을 남겼다. (161)
1) 1910년 전후의 망명촌 건설
- 서간도에 망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895년 김창수, 김형진, 유인석 등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백범의 정보를 듣고 이동녕, 이회영, 주진수, 장도순, 이관직이 답사한 끝에 삼원포 지방은... 은신하기에 적합한 곳이어서 삼원포 일대가 망명지로 선정된 것... (162-163)
- 북간도 지방은 서간도와 달리, 일찍부터 이주민이 많이 살았다...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 1906년 이상설이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 김약연에 의해 명동학교로 발전... 함경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홍범도, 김정규 의병이 연해주와 두만강을 넘나들며 활동... 1908년 이후 연해주에서 기병한 유인석, 이범윤, 안중근, 이석대 의병도 북간도를 드나들며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킴... (163)
-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의병조직이 의군부(이범윤), 철형광복당(계봉우), 대한광복군정부(이상설, 이동휘) 등의 독립군으로 발전하는 한편, 정재면을 중심한 명동학교, 계봉우를 중심한 광성학교(길동기독학교관 후신), 남공선을 중심한 창동학교가 간민교육회의 민족교육을 담당하여 망명 이주민의 정착을 도왔다. 이동휘가 설립한 나자구 사관학교와 하마탄학교가 이른바 간북지방에서 독립운동기지로 개척되던 곳이었다. (163)
- 망명촌이 독립군 근거지로 발전해야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서간도에서는 망명하자 곧 청나라 복색을 하고 청나라 국적을 얻어 토지를 구입하여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163-164)
- 망명촌 건설 -> 민족교육 -> 독립군 양성의 의도적 절차가 진행 (164)
- 1910년대의 독립군 기지는 길림성의 길림이남 지역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것이 3ㆍ1운동 후 특히 1920년 경신참변과 청산리전쟁을 겪으면서 길림성 북쪽이나 흑룡강성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 (164)
2) 3ㆍ1운동과 봉오동ㆍ청산리전쟁
- 북간도 동포사회의 중심지였던 용정과 훈춘, 서간도 동포사회의 중심지였던 삼원포와 통화ㆍ환인 일대에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행정 중심지이자 1917년에는 대한광복회 조직이 일어나고 있던 길림에서는 「대한독립선언서」가 39인의 민족대표 명의로 발표... (165)
- 경신참변은 1920년 6월에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에 참패한 일본군이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만주 출동의 명분을 만들고 10월 14일 이른바 ‘간도출병성명서’를 발표하고 서북간도에 침략하여 살인ㆍ방화ㆍ독가스 살포 등을 자행한 만행이었다. (165)
- 청산리전쟁... 1) 독립군기지를 개척한 독립군의 준비된 전쟁... 연합작전으로 전투를 수행했고, 서부전선의 전투가 끝난 뒤에 러시아로 넘어가기 위하여 밀산으로 집결할 때도 연합작전으로 수행했다는 점... 그래서 그해 연말에 밀산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2) 동포 주민의 지원을 받아 승리할 수 있다는 점.. 지도자는 민중에 뿌리하고 있을 때 지도자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165-166)
- 독립군이 밀산에 모여 러시아로 진군한 것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작전 구도에 의한 것인데 볼쉐비키 혁명에 참가하여 시베리아에 진주하고 있던 일본군과 일대 결전을 편다는 계획... 홍범도ㆍ이청천은 이르쿠츠크파, 김규면ㆍ이용은 상해파, 서일ㆍ김좌진Krlarbtlr은 다시 만주로 돌아오는 등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1921년 6월 자유시... 흑하사변... 청산리 전투를 끝내고 과연 러시아로 넘어가야 했던가? 그렇게 어렵게 넘어간 러시아에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파로 갈라 설 수밖에 없었던가? (166-167)
3) 흑하사변 이후 독립군의 만주 귀환과 삼부의 성립
- 흑하사변이 끝나고 레닌의 중재로 양파의 협상회의가 베르후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되었으나 무위로 끝났다. 1922년 10월 25일 일본군이 퇴각하고 혁명전쟁이 끝나자 독립군은 러시아 군단에 편입되거나 만주로 되돌아왔다. 그러니까 만주에서 독립군 단체가 새로 정비되어야 했다. (167)
- 독립군의 정비... 경신참변을 겪은 뒤 1921년 4월에 북경에서 박용만, 신숙, 황학수 등이 서간도 독립군 대표 이상룡을 초청하여 군사통일회를 개최하면서 시작... 경신참변을 당하고 있던 그때에 정쟁이나 일삼고 있던 이승만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행태에 반발하여 개최... 처음에는 호응을 받았으나, 임시정부의 근본부터 부정한 정치집회로 변질되자 서간도 대표가 퇴각하여 무위로 끝났다. (167-168)
- 독립군의 정비... 서간도 자체에서 다시 시작... 통군부, 의군부, 통의부 등의 명멸... 1923년 1월 3일부터 5월 15일까지의 국민대표회... 통의부 총장인 김동삼이 의장을 맡는 등, 만주 동포사회의 지도자가 중심적 위치에서 활약했으므로 만주독립군의 정비는 보류... (168)
- 임시정부가 만주에서 세력을 만회해 보려고 1923년에 주만참의부를 결성하자 상해 정국의 주가 만주에서 재현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대표회에서 돌아온 인사들이 1924년에 정의부를 결성하였다.... 러시아에서 귀환한 독립군이 신민부를 결성... 삼부시대... (168)
- 참의부가 임시정부 기호 인사와 손잡고 탄생한데 대하여 정의부는 임시정부 서북 인사와 손잡고 결성되었으므로 이것을 만주에서 표현된 기호파와 서북파의 알력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임시정부를 기준으로 말하면 기호 인사는 임시정부 고수론을, 서북인사는 임시정부 개조론을 주장했다. (168)
- 1923년 연해주에서 결성된 적기단이 흑룡강성 중동선 일대로 이동하여 활동하였고, 1926년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흑룡강성 일면파에서 결성되자 그도 중동선 일대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시작되어 세력 판도 문제가 중복 제기되었던가 하면 한편 만주 동포사회에 새로운 사상과 의식이 확상되어 갔다. (169)
4) 유일당운동과 조선혁명군 및 한국독립군의 창설
- 만주에서 사상적 분화가 나타나자 공산주의 운동의 전략ㆍ전술의 하나로 통일전선이 제기되었다. 1924년에 중국국민당의 좌우합작(국공합작)에서 비롯된 것... 그 영향이 한국독립운동에도 반영되어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뒤 구체화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 북경촉성회가 결성된 이후 국내외 각처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 국내에서 신간회 결성... 중국 관내에서는 유일당촉성회가 결성... 임시정부는 유일당 탄생을 예상하여 1927년 4월 11일 헌법을 고쳐 이당치국 체제를 갖추었다. (169)
- 1926년에 양기탁 등이 정의부의 지도 정당으로 고려혁명당을 결성... 1927년에느 ㄴ정의부에서 신민부 참의부 인사를 설득시켜 재만 사회운동ㆍ청년운동 단체까지 포함하여 유일당 결성운동을 추진하였다. (170)
- 1927년 국공합작이 북벌 도중에 분열... 남경정부와 서금정부로 분열할 뿐 아니라 국공전쟁이 전개... 3부 통합회의로 방향을 바꾸어 1929년에 국민부와 한족총연합회로 조직을 개편하는데 그쳤다. (170)
- 유일당운동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유일당운동을 통하여 정당이 독립운동 또는 정치운동 중심에 부상한 것은 한국 정당사에서 주목할 점... (170)
- 1929년과 1930년에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결성... 이어 정당의 당군으로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을 설치... (170)
- 조직에서 사회주의운동 방식을 도입... 조선혁명당은 노농사회를 지향할 정도로 진보적이었고, 한국독립당 당강에서는 민본정치, 노본경제, 인본문화를 표방할 정도로 이념도 사회주의적이었다. (170-171)
-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은 만주에서 우익 정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당으로 보기는 힘들다... 만주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추적할 때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해서 처리할 필요가 있다. (171)
- 국민부ㆍ조선혁명당ㆍ조선혁명군... 400명 정도의 병력... 한족자치연합회ㆍ한국독립당ㆍ한국독립군... 400~450명...(171)
5) 만주국의 건립과 한중연합군의 반만항일전쟁
-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이듬해 3월 1일에 그들의 괴뢰정부로서 만주국을 건립하였다. 그리고는 중국 본토 침략에 착수하였으니 금주침공과 상해사변이 그 구체적 실천이었다... 한국독립운동은 새로운 난관에 봉착... (171-172)
- 일본의 만주침략... 1909년 간도협약 - 1920년 간도침공 - 1925년 삼시협정 - 1928년 장작림 폭사 - 1931년 9ㆍ18사변 - 1932년 만주국 건립의 순서로 진행... (172)
- 만주국이 건립된 뒤부터 만주국의 관헌조직과, 일본군과 경찰의 조직적 활동, 중국인 한간과 한국인 주구배의 준동으로 독립운동은 사면초가를 맞아 희생이 막심하였다... 만주사변 전후에 김좌진, 김종진, 김동삼, 남자현, 김규식, 이원일이 희생되거나 체포... 이호원, 김관웅, 이종건 등, 신빈사건에서 조선혁명군 10여 명이 잡히거나 희생된 것도 일제의 정보망 속에서 당해야 했던 비극... (172)
-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중국의용군과 한중연합작전으로 반만항일전선이 형성... (172)
- 신빈현에 본부를 두고 있던 조선혁명군은 이진탁에 이어 양세봉이 사령관을 맡아 1932년 3월 12일 영릉가전투를 승전하고, 4월에는 당취오를 중심으로 한 요녕구국회 또는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하여 환인, 통화, 유하현을 평정하고, 1933년 5월에 신빈 청원현 전투에 이어 다시 영릉가전투를, 7월에는 석인구전투와 무순현 노구대전투를 통하여 독립군 기상을 높였다. 이때 양정우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조선혁명군의 활동은 1934년 9월 20일 양세봉 장군이 함정에 빠져 순국하면서 쇠퇴하였다. 그뒤 조선혁명군은 김활석이 지휘하여 1938년까지 항전하였다. (172-173)
- 현익철, 최동오, 김학규 등의 조선혁명당 인사가 관내로 들어가 1935년에 민족혁명당 창당에 조선혁명당 당명으로 참가하면서 김활석까지 민족혁명당 중앙위원에 포함되어 조선혁명군은 명목상 민족혁명당 당군이 되었다. 중일전쟁을 앞두고 민족혁명당을 탈퇴하였지만, 이와 같이 파쟁에 싸였던 가운데 조선혁명당의 젊은이가 1938년 장사에서 남목청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것은 현익철을 중심한 조선혁명당 중진이 만주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던 김활석의 조선혁명군을 방관하고 있던 사실에 격분한 나머지의 행동이었다. (173)
- 이청천을 중심한 한국독립군은 이두, 정초, 오덕림, 오의성, 시세영 등의 길림자위군 또는 중국구국군과 연합하여 중동선 일대에서 싸웠다. 1932년 1월의 서란현전투, 1932년 9월의 쌍성보전투, 1933년 2월의 경박호전투, 그해 6월의 동경성전투와 7월초에 걸친 대전자전투, 동녕현성전투를 치렀다. 동녕현전투에는 오의성의 길림구국군이 참전했는데 참모는 주보중이 맡았고, 왕청유격대는 김일성도 참전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빨치산 인원이 적지 않게 참전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한중연합전선의 주도 세력이 점차 공산주의자로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녕현성전투가 끝나고 구국군을 지휘하던 시세영과 사충항이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것도 그때의 형편을 말해주고 있다. (173-174)
6) 독립군의 관내 이동과 동북인민혁명군
- 그 무렵 한국독립군의 관내 이동이 추진...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자, 김구와 장개석 사이에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 설치를 합의한 뒤 이청천에게 한인특별반을 맡아줄 것을 타진해 온 것... (174)
- 1933년 10월에 한국독립당 당수 홍진과 한국독립군 사령관 이청천을 비롯하여 김창환, 황학수, 신숙, 김상덕, 조경한, 오광선, 공진원 등 40여 명의 독립군이 남경이나 낙양으로 이동... 관내로 가지 않은 최악, 안태진 등의 잔여인원은 북만주에서 항전을 계속하다가 대부분 공산당 유격대에 편입하였다. (174)
- 1928년 말... 코민테른 6차 대회에서 1국 1당의 원칙이 채택...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해체되고 한국 공산주의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1930년 5ㆍ30투쟁... 8월 길돈봉기,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추수투쟁, 1932년 춘황투쟁... 1931년 중공당 만주성위원회 소속 당원 1,190명 가운데 97%가, 또 공산청년당 1,500명 가운데 39명을 제외한 97.4퍼센트가 조선인 공산주의자... (174-175)
- 중국공산당 지도하의 한중연합전선이 형성... 1932년 연길유격대... 1933년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발전... 통일전선은 민생단 사건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175)
7) 조국광복회와 동북항일련군의 보천보 공략
- 민생단 문제는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의 인민전선 전략의 채택으로 해결... 1936년에 전광을 중심으로 조국광복회가 결성... (176)
- 김일성이 지휘하는 한인부대가 1937년 6월 보천보 공략...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대서특필... (176)
- 1936년 2월 20일 「동북항일련군 통일군대 건제선언」이 발표... 여러 갈래의 반만 항일군을 통일 조직으로 재결합하고 효과적인 한중 통일전선을 형성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동북항일련군이 1군에 11군까지 결성되었다. (177)
8) 동북항일련군의 소련 이동과 임오교변
- 동북항일련군은 1940년부터 러시아로 이동... 1940년에 홍기하전투를 끝으로 김일성이 이동하고 뒤따라 최용건이 이동하고, 전광은 이동하던 중 잡혀 전향했다고 한다. 1942년 허형식이 전사... 마지막으로 김책도 넘어갔다... 88여단에 편입... (178)
- 1942년 이후의 만주는 독립운동의 고장이 못되었다... 지하활동... 1944년에 조선의용군의 선견대로 하얼빈에 잠입했던 이상조는 취원창에 거주하던 독립운동자 김형식을 독립동맹 북만 책임자로 포섭하여 활동하였고, 그에 앞서 영안현 동경성 일대에서 윤세복, 안희제 등의 대종교 교인들은 발해농장과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11월에 모두 잡혀 고역을 겪었는데 임오교변이라 한다. (178-179)
- 김형식은 구한말 안동 협동학교 교원으로 활약하다가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아버지 김대략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학교 성립에 참여한 후 해방 때까지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해방 후에 김두봉의 초청으로 북한으로 들어갔는데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을 때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월송(金月松)이 바로 그 사람이다. (179)
2. 재만독립운동의 특징과 반성
- 재만독립운동은 독립전쟁의 역사... 망명촌과 민족사회라는 경제적ㆍ문화적 독립운동 기지 또는 근거지를 발생 기반으로 구축... 망명촌은 일본 식민 통치를 거부한 집단... 따라서 망명촌에는 새 조국 건설을 위한 민족 교육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망명촌 건설-민족교육-독립군양성이라는 절차가 해외독립운동의 전형적 코스로 확립되었다.... 청산리 전투... (179-180)
- 청산리 전쟁에서 대승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층과 민중의 연대에 이유가 있었다. (180)
- 자유시참변... 홍범도ㆍ이청천은 이르쿠츠크파로, 김규면ㆍ이용은 상해파로 분열... 독립군을 러시아로 이동시킨 이동휘에게는 실책이 없었던가에 대해서도 반성해야 한다. (181)
- 망명촌은 기초한 재만독립군이었으므로, 독립군 단체는 동파사회를 관할하는 민정과 독립전쟁을 관할하는 군정의 이원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사조가 확산되면서 민정의 기반이 변질되기 시작... 우파 정당은 농민의 기반을 빼앗기면서, 재만독립운동은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공산주의 노선으로 옮겨갔다. 그것이 1933년 이후의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역사이다. (181)
-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김형식, 이세영, 이관직, 주진수, 황만영처럼 양반지주 출신자도 망명 후에 소작농으로 전락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한 자신의 역사적 처지를 비판적 안목으로 자성하면서 새롭게 이상사회를 탐색한 나머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유교 대동주의에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접목시킨 경우가 많았다. (181-182)
-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은 1929년 경제공황의 폭발과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로 더욱 확산되어 갔다... 독립운동의 길이 아니면, 아예 일본의 주구단체인 조선인민회에 가담하여 만주국의 차등국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182)
- 한간과 주구배도 독립운동을 가장한 경우가 많았다... 1932년에는 민생단 사건이 발생... 소문에 그친 민생단을 실재한 것처럼 중공 만주성위원회에서 반민생단 투쟁을 전개하여 몇 천명의 조선 공산주의자가 희생되거나 감금... (182)
- 통일전선 추구... 청산리전쟁 끝의 대한독립군단의 결성부터 시작하여 1921년부터 군사통일회ㆍ통군부ㆍ통의부ㆍ남만통일회ㆍ전만통일협의회에서 보듯이 재만독립운동의 초기부터 통일은 숙명적 과제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3년부터의 동북인민혁명군이나 1936년부터의 동북항일련군의 경우에도 통일전선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민족 간의 통일전선 성격이 강했다. (182-183)
- 독립운동전선에서 통일 또는 통일전선이 끊임없이 추구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통일전선의 형성에 앞서 서로를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했다. (183)
- 통일전선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통일이 최대 과제라는 한반도의 현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통일전선을 형성했을 때 표방한 강령이 가장 역사적 의미를 남기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도 알 수 있다. 3ㆍ1운동 선언서 이후에는 1936년의 조국광복회의 강령과 1941년의 임시정부 건국강령이 독립운동의 이념을 가장 적절하고 정당하게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통일전선을 추구하고 있던 때의 강령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83)
- 1940년부터 동북항일련군까지 러시아로 이동하여 만주는 독립운동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20년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로 넘어갔던 사실과 1933년 한국독립군이 관내로 이동한 것과 아울러 독립군의 만주 탈출의 역사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일정하게 재단할 수 없을 것 같다. (183-184)
- 해방과 더불어 만주에는 조선의용군이 개선 진주하였다. 그리고 확대 개편하여 중국 해방전쟁에 참전하여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만주에서 독립군의 독립전쟁, 항일련군의 혁명전쟁, 조선의용군의 해방전쟁의 결실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탄생하였다. (184)
- 만주에서는 한중연합군으로서 동북항일련군의 역사가 전개되었고, 중국 관내에서는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분열과 통일문제가 독립운동에서도 가장 큰 의의와 반성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날의 남북 분단이 당초에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로 보면, 한반도 조선사람은 민족사적 교훈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184)
[제4절] 신간회의 설립과 해소
1. 신간회 결성의 의의
- 신간회는 일제하인 1927년 2월 15일부터 1931년 5월 15일까지 4년여 동안 있었던,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한 민족연합전선의 조직이었다. (186)
- 민족주의 안에서 좌우파의 구분이 생긴 것은 춘원 이광수가 1924년 초에 「민족적 경륜」이란 글을 발표하여 일제와 타협하면서 자치론적 민족운동을 제의하고 나섰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그들을 우파라 했다... 연정회... 3ㆍ1운동 전후에 대두한 민원식 등의 참정권적 자치론과는 그 의도하는 바가 다른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개량주의이론이었으므로 모진 비판을 받았다. (186)
- 인도와 조선의 식민조건의 차이... 인도에 대한 영국의 통치방식은 군대의 주둔 외에, 행정에서는 영국인이 5천명 전후의 인원이 주재할 뿐이고 나머지는 인도인이 담당할 정도로 간접통치 실시... 조선에서는 일제는 1909년에 일본인 이주를 2백만명 계획했고 실제에도 1백만명이 주재하며 군사면 외에 행정ㆍ교육ㆍ산업ㆍ금융 등을 말단까지 지배한 직접통치... 직접통치를 당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자치란 식민적 조직을 확대, 강화하는 의미밖에 없었으니 춘원의 제창은 모진 비판을 받아 마땅하였다. (187)
- 이광수의 자치론이 제기되자 이상재, 신채호, 신석우, 홍명희, 안재홍 등은 그를 개량주의라고 반박하면서 자신들의 비타협노선을 좌파라고 자칭하고 우파에 맞서게 되었다... 오도되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하여 어떤 대책이 강구되어야 했다. 그때에 사회주의 진영과 연락하여 양측이 연합한 기구로서 신간회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즉 비타협이란 공통분모 위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연합전선의 형성을 모색한 것... (187)
- 사회주의라면 민족사회주의와 혁명사회주의로 구분할 수 있는데 당시 국내에서는 두 가닥을 구별하지 않은 채, 1925년에 결성한 조선공산당이 모두를 대변하고 주도하고 있었다. (187)
- 개량주의라는 타협론이 상황의 주객체에 따라 그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188)
- 「정우회선언」... 3ㆍ1운동 후 독립운동의 전열이 민족ㆍ공산의 두 진영으로 분열한 뒤에 국민대표회, 조선민흥회,국민당계획 등으로 두 진영의 합동 또는 연합이 시도되다가 끝내는 실패하여 신간회의 결성으로 성취... 그 연합이 비록 통합은 아니었다라도 오늘날의 통일지향적 처지를 생각하면 그 의의는 큰 것이다. (188)
2. 공과의 논의
- 신간회는 1) 정치적 경제적 각성, 2) 민족적 단결, 3) 기회주의의 배격 등의 3대 강령... 신간회의 조직이나 활동의 공과에 대하여 논란... 문자계층을 중심한 조직이었으므로 일제하 피해계층의 대종인 농민, 노동자는 제외되었지 않았느냐? 때문에 그의 활동도 역시 개량주의적이 아니었느냐는 것이다. 당시 8할 이상이 농민이었으므로 그를 위한 구체적 활동이 없었다면 민족주의든 공산주의든 이론의 유희에 빠져 있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 더구나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여독으로, 또 그 위에 강요된 산미증식계획이나 비례세제 등으로 중산층이 소작 농민으로 몰락해 가던 그때에 더욱 주목해야 할 비판인 것... (188-189)
3. 해소와 그 교훈
- 신간회는 1931년 5월 15ㆍ16일 공산 진영측이 주도한 전국대회에서 해소를 결정하고 말았다. (190)
- 조선일보에서는 공산측이 국제연장주의에 맹종한 탓이라 했다. 즉 민족적 고려 없이 코민테른이나 프로핀테른의 정책에 추종한 탓이라는 것이다. 동아일보에서는 당초부터 민족진영의 피동적 자세가 강했던 데에 문제가 있다고 분석... 젊은 학자간에는 조직 성격이 정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천적 운동조직도 아니어서 존립 명분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191)
-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테제’와 특히 1930년 프로핀테른의 ‘9월테제’에서 신간회 개량주의화했다고 비판한 것을 성급하게 받아들인 한국공산주의자들의 해소 추진에 있었다. (191)
- 프로핀테른의 지적대로 신간회가 개량주의에 빠졌다면 그 점을 시정하면 될 것을, 빈대 무서워 초가삼간 태우듯이 해소를 서두른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 자체로 봐서도 실책이었다. (191)
- 1929년에 조선공산당도 해체한 뒤였는데 신간회의 조직도 없애버렸으니, 그 후 공산주의 운동도 의지할 조직이 없어 고아처럼 방황하다가 조선공산당의 재건도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8ㆍ15 때 공산주의 운동의 주인이 없는 꼴이 되고 말았지 않았던가 말이다. 후일 공산측에서 신간회의 해소를 과오로 지적했던 것도 그러한 실책을 의미했을 것이다. (191-192)
- 해외에서 연합전선의 모색... 민족유일당운동으로 표현... 1926년 북경의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에서 비롯... (192)
- 신간회의 존재는 일제에게 큰 위협이었다... 해체된 뒤에 일제는 신간회와 같은 민족운동을 두려워한 나머지 신간회의 주역이었던 「조선일보」의 안재홍과 이승복에게 재만동포옹호동맹의 의연금을 횡령하였다는 누명을 씌워 1932년 감금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양기탁을 국채보상금 횡령으로 와해시킨 전례... (192)
4. 신간회의 유산
- 신간회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방략으로 사상이 연합하고 또한 그 사상단체가 연합한 민족적 조직이었다... (183)
- 신간회가 해체된 1930년대 전반기는 민족해방운동이 퇴색한 시기였다. 사회주의 진영에서 민족해방보다 계급해방을 지향한 탓이었다. (193)
- 1935년경부터 반성이 일어나 계급혁명이론이 물러나고 민족혁명이론이 앞서게 되어 학원에서도 민족주의 학생단체가 양적인 면에서는 물론, 질적으로도 크게 발전해 갔다... 이때 민족주의 이론은 1920년대의 것에 사회주의 이론의 장점을 도입한 신민족주의였는데 안재홍 등에 의해서 제창되었다. 그것은 신간회라는 공동의 광장에서 태동한 민족주의의 수정이론인 것이다... 손진태ㆍ조윤제... (193-194)
- 삼균주의는 상해에서 1931년 조소앙이 제창한 것이다... 삼균주의는 국균, 족균, 민균이란 것은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모순 없는 결합을 지향한 이론이고,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은 사회주의 이론인데 그것이 의회적 절차를 표방하고 있는 데에서 공산주의와 구별된 민주사회주의의 이론이었다. (194)
- 1939년부터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양당에 의한 정당정치가 구현... 이때 양당의 정강이 모두 삼균주의적이었다는 점도 주목되었지만 정당정치를 구현했다는 것이 신간회의 정당지향성이나 유일당운동의 이당공작을 표방한 것이 유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 (194-195)
- 정당의 연합체제는 1942년 임시의정원이 이른바 통합의회를 구성한 데에서 달성되고 있었다. 김구, 조소앙 등의 한국독립당과 김규식, 김원봉 등의 민족혁명당과 유림 등의 무정부주의 동앰이 1942년부터 함께 임시의정원에 참가하면서 임시정부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연합전선은 신간회의 시범적 유산으로 이해되어 좋을 것이다. (195)
- 신간회의 유산은 신민족주의나 삼균주의의 이념으로, 정당정치의 구현으로, 연합전선의 형성으로 전승되어 8ㆍ15를 맞았다고 하겠다. 이렇게 보면 신간회는 8ㆍ15까지 모양을 달리하여 살아있었음... 해방정국을 지배한 미ㆍ소가 그러한 주체적 조건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것을 악용하여 국토를 분단하고 말았으니 신간회의 해체 때처럼 악용당한 민족적 과오를 반성하면서 신간회의 안목을 되살려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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