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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제3장 : 불확실의 시대

by [수호천사] 202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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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터는 이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단으로 간주된다. 415일부터 시작하여 21일간의 유예 기간 후에는 아무도 그에게 거처를 제공할 수 없다. 그의 추종자들도 정죄되었으며 그가 저술한 책들은 인류의 기억에서 지워져야 한다.” - 보름스 칙령 (53)

 

# 유배, 사회ㆍ정치적 불안, 반란

  •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숨어 지내면서 수염을 길렀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기가 생존해 있음을 알렸고, 주로 저술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독일어 성경 번역... (54)

  • 칼슈타트 및 그의 추종자들이 교회 안에 있는 성인들의 조각을 파괴하기 시작했을 때 루터는 중용을 촉구했다... 츠비카우로부터 세 명의 평신도들이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 하나님이 직접 자기들에게 말씀하시므로 성경이 필요없다고 주장... 이것이 복음 자체의 존재 여부를 위험하게 하는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린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가기로 결정함... (55)

  • 카를 5세는 루터파 이단을 박멸하기로 결심하고 있었지만 강력하고 시급한 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므로 루터를 지지하는 독일 국민들을 적으로 돌릴 여유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적수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 (55)

  • 레오 10세의 사망 이후... 아드리안 6세는 비이탈리아인 교황이었으며, 교회생활을 개혁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교리적으로는 전통적인 가톨릭 정통 신학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56)

  • 아드리안 6세가 1년 반만에 사망하고 클레멘트 7세는 다시 레오의 정책으로 전환... 종교적ㆍ신앙적 문제들보다 예술과 문학, 그리고 이탈리아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와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가톨릭 측은 독일의 개혁가들에 대항한 일반적 연합정책을 수행할 수 없었다. (56)

  • 카를 5...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 왕을 포로로 잡음...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석방시켜주었으나 프란시스튼 카를에 대항하여 클레멘트의 지원을 확보함... 카를이 투르크족을 격퇴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프란시스와 클레멘트가 카를에게 선전포고를 함... 1527년 스페인과 독일 병사들로 구성된 제국군이 이탈리아를 침입... 1528년 초 영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이 교황을 돕기 위해 옴... 제국군은 후퇴함... 1529년 카를은 교황과 프란시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함... (56-57)

  • 카를이 다시 독일 영토 내의 이단자들에 대한 조처를 준비하고 있을 때 슐레이만이 이끄는 투르크족이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침공함... 투르크에 대항한 연합전선 결성... (57)

  • 1522-1523년에 프란츠 폰 지킹겐의 지도 아래 기사들의 반란... 당시 기사 계급은 세력을 상실해가고 있었으며, 영지와 재산을 상실한 기사들 사이에 국가주의 의식이 높았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자기의 불행이 로마 때문이며 루터가 독일 국가의 수호자라고 생각하였다... 울리히 폰 후텐 같은 사람은 루터의 종교적 가르침에 공감하면서도 루터가 지나치게 온건하다고 생각함... 반란군들은 독일 영주들에게 패배... 루터와 그의 가까운 동료들은 이 사건을 신자들이 기존 권위자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진리를 증명해주는 큰 비극으로 여겼다. (58)

  • 1524년 농민전쟁... 농민들의 다수가 개혁가들의 가르침이 자기들의 경제적 요구를 지지하고 있다고 믿었다... (58)

  • 토마스 뮌처...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니라 성령의 현재적 계시라고 주장... 성령에 의해 중생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신정(神政) 공동체에 참여해야 한다... (59)

  • 농민들은 “12개조에서 경제적ㆍ종교적인 요구들을 내세웠다... 루터는 자신의 교리와 반란 사이에 아무런 관계를 찾을 수 없었으나, 농민들은 관계가 있다고 여겼다... 가톨릭 영주들은 루터주의가 반란의 원인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온건한 영주들도 자신의 영역에서 루터파의 증가를 방지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다. 루터가 자기들을 배반했다고 생각한 많은 농민들이 옛 신앙으로 돌아가거나 재세례파가 되었다. (59-60)

  • 루터의 결혼과 가정생활... (60-61)

  •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루터... (61)

  • 에라스무스는 믿음에 대한 칭의, 제사로서의 미사, 혹은 교황의 권위에 관한 문제 대신 자유의지의 문제로 루터와 설전을 벌였다... (62)

  • 자유의지에 대한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의 결과로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루터 진영에서 이탈하였다. (62)

 

# 제국 의회

  • 1523년 뉘른베르크에서 다시 제국의회가 소집되었을 때에는 교황과 황제가 보낸 대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주의를 향한 융화정책을 결의하였다. (63)

  • 1526년 카를이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 교황 클레멘트 7세를 대항하여 전쟁하고 있을 때, 스파이어 의회는 공식적으로 보름스 칙령을 철회하고 많은 독일의 공국들이 각각 자기들이 선택하는 종교를 공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63)

  • 1529년 개최된 스파이스 제2차 의회는 또 다른 모습을 보였다. 황실의 개입 위협이 가중되었으므로 그때까지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많은 영주들이 가톨릭 진영으로 옮겨갔다... 보름스 칙령이 재승인... 이러한 이유 때문에 루터파 영주들이 공식적 항의문을 제출했으며, 이에 따라 프로테스탄트-저항하는 이들, 혹은 항의하는 이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63)

  •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주 저자는 멜란히톤...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슈말칸덴 동맹을 결성하여 무력을 동원하여 칙령을 시행하고자 하는 카를에게 저항하려 함... 프랑스의 프란시스와 투르크의 움직임 때문에 카를과 대결은 없었음... 1532년 뉘른베르크 화의를 체결함...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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