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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한 시대의 마지막임과 동시에 또 다른 시대의 시작이다. 그는 고대 교부들의 맨 마지막이며, 동시에 중세신학의 선구자이다. 고대신학의 주류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합류되었다가, 그에게서 중세 스콜라주의의 강물뿐만 아니라 16세기 개신교 신학의 강물까지 도도하게 흘러내려 온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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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관한 강조와 인간의 절대무능,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 영혼의 의존”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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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절대은혜주의로 불리는 어떤 개념을 기독교 사상의 흐름에 도입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이러한 사상의 일부분을 “예정론”을 알고 있고 자동적으로 이것을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뱅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섭리와 구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중심적인 사상은 보다 넓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사상에는 즉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자이시요, 능력이시며, 인간들은 집단이든 개인이든 하나님의 은총이나 분노의 도구들이고 수단들이라는 사상이 기본적으로 포함되어있다. (3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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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기독교 신학... “신인협동설”...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코 인간의 자유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의 전반적인 기조는 하나님의 완벽한 의지를 위협하는 어떠한 인간의 자유의지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실재” (302)
#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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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영적 순례의 과정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문 형식... 유년기부터 성년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든 죄들을 상세하게 드러내 밝혔고 곳곳마다 자신의 전적인 타락과 또 치유와 변화를 일으키게 했던 하나님 은총의 능력을 강조했다.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을 포함하여 인류에 대해서는 비관론자였고 은총에 관해서는 낙관론자였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30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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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인으로 어릴 적부터 자랐지만 청소년기에 신앙의 방황을 했고 특별히 젊은 시절 카르타고에서 학교를 다닐 적에는 매우 방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 시절 그는 “견딜 수 없는 욕망의 갈망을 억제하려는” 노력과 철학과 종교를 공부하면서 의미있는 삶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시도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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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 두 개의 영원하고 동등한 선과 악의 강력한 힘들은 끊임없는 투쟁에 갇혀있는 것으로 믿었다. 영지주의자들처럼 그들은 악의 원인을 물질-악한 원리의 피조물-에 두었고 선의 기원은 하늘의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에다 두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같은 이원론과 영성에 환멸을 느끼게 되자 결국 북아프리카를 떠나 로마와 밀라노로 갔다.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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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아카데미... 신플라톤주의 서적을 탐독... 이것들은 그에게 물질적인 것이 아닌 무한한 영적 실재가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를 받아들ㄹ이지 못하도록 막았던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신플라톤 철학은 그에게 악에 관한 통찰력을 제공했는데, 이것은 카파도키아 교부 니사의 그레고시우스가 가르쳤던 것, 즉 악은 실체가 아니고 선의 결여라는 것과 비슷했다... 신플라톤 철학(이방 철학)은 그의 어머니가 믿는 종교로 들어가는 문을 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들 가운데 하나를 그에게 제공했다.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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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부로시우스의 설교는 기독교를 잘못 이해했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암부로시우스는 우리는 기독교인이면서도 동시에 지성과 용기와 이론을 갖춘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주었다.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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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역설적인 기도... “오, 하나님, 나에게 순결의 은사를 주옵소서... 그러나 아직 아닙니다.” 밀라노에서 현재 그는 결단의 순간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죄 되고 자기 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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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년 8월 어느날... 회심...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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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승이 되기 원했지만... 395년 히포의 감독이 됨...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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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도와 논쟁... 도나투스파와의 투쟁... 펠라기우스와 논쟁...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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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게네스만이 책의 분량으로 따진다면 아우구스티누스를 압도할 뿐이다.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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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신학적인 주제들에 관한 그의 사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했고 변화했다. 그래서 그의 사고 체계 안에 변화들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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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모순된다기보다는 끊임없는 발전과정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1) 마니교와의 투쟁... 신플라톤주의는 하나님에 관해,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에 관한 그의 사상 체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2) 도나투스와의 투쟁... 교회와 성직제도, 그리고 성례전에 관한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그의 사상은 가톨릭 신학의 독특한 보증이 되었다... 3)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인간 타락과 하나님 주권에 관한 그 자신의 독특한 견해들을 발전시켰다. (30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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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반(反) 펠라기우스 입장들은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상 모두에게 논쟁뿐만 아니라 창조성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다. 동방측 교회는 결코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309)
# 선과 악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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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의 세계관은 영지주의와 약간 유사... 물질적인 세상의 기원들에 관한 환상적인 신화들을 과다할 정도로 발전시켰다... 마니교는 물질은 악하거나 악의 근원이라고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비물질적이고 영적인 실재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제시하지 못했다. (30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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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본질에 관하여』... 마니교 반박의 주요 저서... 405년경 저술... 존재와 선의 존재론적인 일치나 악에 관한 신플라톤적인 사상들에서 창조자로서 기독교 하나님 개념을 설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악의 존재와 상응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냈다. 다른 말로 하면 악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 안에 두 개의 동등한 세력들이나 원리들의 존재(이원론)-하나의 선과 하나의 악-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에 의하면 악은 하나의 본질이나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본성의 타락이다.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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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부터” 창조된 본성은 어떤 것이든 자동적으로 하나님보다 못하며 그러므로 형이상학적으로나 절대적으로 완벽하지 못하고 타락의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본성은 절대로 부패할 수 없다. 또한 인간본성은 자유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덜 선한 것을 선호하면서 잘못 사용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선의 결핍, 즉 자유의지의 남용이요 타락의 진정한 기원이요 근거이다. “죄는 악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보다 나은 것의 포기이다. 그래서 행위 자체가 악한 것이지, 죄인이 잘못 사용한 본성이 악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한 것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 악이기 때문이다.” (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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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악한 것은 악한 의지... 악은 실지로 무(nothingness)이다. 자유의지는 악이 아니다. 그것이 죄를 범할 경우도 악이 아니다. 다만 실제로 그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그것을 악한 의지로 만든 것이 악이다... “죄악의 신비”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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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창조에 관한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강력하게 반대... 그러나 마니교 보다는 덜 위험하고 복음을 위해서는 보다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1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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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와 논쟁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력하게 주장... 마니교도들은 악의 기원을 영원한 악의 원리와 물질 창조의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논점을 타락 이전의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크고 넓은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소유했었다고 믿었다. (312)
#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과 성례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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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투스파 사람들의 눈에는 보편교회의 감독들은 부도덕하고 타락한 아무 권위도 없는 사람들로 비추어졌다. 그들은 보편교회의 감독들이 베푼 성례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과 혈통을 보면 박해 때 이미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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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 성례전과 그것의 유효성,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 도나투스파의 교회론의 본질은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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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교회는 세상 전역에 흩어져 있고 그 교회 내부에는 선인과 악인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은 마지막 날 심판 때에 가서야 최종 분리될 것이다.”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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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성례전 신학에 의하면, 세례와 성만찬과 같은 성례전들은 “수여 행위 그 자체에 의해” 은총이 수여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성례전의 능력과 유효성은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놓여 있고 그것을 집레하는 사제는 단지 그리스도의 은총의 수단이다.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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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나 감독들은 성례전을 집전할 수 있으며... 성직자와 감독은 그들이 적절한 절차에 의해 사도적 계승권 안에서 임직을 받았다면 삶을 변화시키고 은총을 나누어주는 데 효과적인 성레들을 집례할 수 있는 것이다. “엑스 오페레 오페라토”(ex opere operato, 수여 행위 자체에 의한) (31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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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와 성만찬을 성례전과 동일시... 교회의 다른 의식들과 예식들은 거듭나게 하며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이요 통로처럼 취급했다... “세례 갱생”... 세례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을 위한 장소(림보)... (315)
#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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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크게 강조하는 경향... 자신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다고 믿었다.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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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년경 펠라기우스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도덕적인 음란한 생활을 하고 있고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도덕적인 순결과 순종에 대해 무관심이 증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고 있는 현실 목격... 기독교인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절제의 은사(음란을 삼가는 것)을 주시지 않으면 절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들이 음란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펠라기우스는 『본성에 관하여』란 책을 써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비난했고 인간은 그들을 “본능적인 재능”을 통해 죄 없는 삶을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원죄, 자유의지 그리고 은혜에 대한 대논쟁을 유발시킨 촉매제였다. (316)
# 펠라기우스와 펠라기우스파 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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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에 관하여』, 『자유의지에 관하여』... ‘다루기 힘든 이단자’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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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도덕주의자였고 교회에서 엄격한 도덕적인 태도와 행동을 촉진하는 데 관심을 두었던 사람이다... 유아세레를 수용했으나, 유전의 죄를 씻어버린다는 것은 부인했다. 그는 원죄의 개념을 전적으로 거부했다.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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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가우스는 인간이란 실로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선택할 수 있고 결코 고의적으로나 죄스럽게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죄가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는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라고 주장했다.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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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펠라기우스가 원죄를 부인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3) 은총을 제쳐두고 자유의지를 통해 완벽한 죄 없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31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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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을 부인했다. 동방교회의 원죄설을 부인하지 않았다... 원죄가 유전된다는 것을 부인했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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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알면서 죄를 짓도록 선택했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죄의 필연성을 부인하고자 했다... 죄는 사회적인 병폐이지 유전적인 것은 아니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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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양심의 충분한 도움과 율법의 수여를 고려했던 것 같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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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는 기독교인은 그가 원한다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구도 실제로 이 같은 삶에 이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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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 펠라기우스의 태도를 “당위성은 가능성을 의미한다”는 격언으로 풀어냈다. (320)
# 펠라기우스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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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자유의지, 은총에 대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에 대응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에 관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은총의 도움 없이 죄 없는 완벽한 삶의 가능성을 주장했던 펠라기우스의 이단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신인협동설을 논박하는 데에 성공했다... 은총중심주의만을 정통 구원론의 기초로 삼았다.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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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 1) 타락 이후 인간 존재의 절대적이고 전적인 타락... 2)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전적인 능력과 주권...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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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와 인간 타락에 대한 견해는 어느 누구의 입장보다도 강하다.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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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간들은 타락한 상태로 태어나 죄를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담의 죄책을 물려받아 영원한 저주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하며 믿음과 사랑을 통한 은총 안에서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모든 인류에게 유전된다고 보았던 자신의 원죄교리의 근거를 로마서 5:12에서 찾았다. (그러나 서툴게 번역된 라틴어 성경을 참고했다)... 그리스어 성경,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라틴어 역본, “그(즉 아담)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12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사망이 만연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는 죄와 죄로 인한 타락은 성적 생식과정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믿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과 같은 출생과정을 거치지 않고 태어났다면, 그의 인성은 죄가 없다고 믿었다. (3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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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적 동일성”... 신생아는 물론 중년, 노인들도 아담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부패하고 죄가 있다. 그와 같은 관계는 세례를 통해 잠정적으로 깨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사람이 세례 받은 후 다시 죄를 범할 때 즉시 재생된다. 그러므로 회개와 성례전적인 은총의 수단을 통해 그와 같은 관계는 거듭 깨어져야 한다.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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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유전과 타락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한 인간은 죄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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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입장을 어쨌든 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의미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 죄와 악은 오용의 산물이지 본질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죄는 피할 수 없지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32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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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견해를 자유의지의 완벽한 상실로 보지 말라고 주장했다... 자유의지는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상 불순종하게 되어 있고 또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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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의했다... 죄를 지을 자유는 있지만 죄를 짓지 않을 자유는 없다...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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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양립이 가능한가?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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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전권자이며 인간의 죄를 포함하여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지 그의 주권적인 의지와 능력에 기인해 있음에 틀림없다....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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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의 선물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떤 선한 행동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타락이 믿음을 약화시키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포함한 하나니의 은총의 충족함만이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만이 어떤 진정한 선한 행동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강조하는 이유이다.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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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인 은총의 도움을 제쳐두고 오직 본성과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어떤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은 셈이 된다.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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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결론은 오직 하나님만이 죄와 악뿐만 아니라 구원과 의로움을 포함한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미리 예정하신다는 것이다.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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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예정에 관하여』... “무조건적인 선택”과 “불가항력적인 은혜” 주장... 하나님은 인간들 가운데 일부를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은총에 의한 믿음의 선물을 받도록 선택하셨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가 은총의 선물을 받도록 선택한 사람들은 은총이 주어질 때 저항할 수 없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결정” (325)
#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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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예정하셨는가? 그는 결코 악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신비의 영역 속에 남겨두었다.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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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고 하나님은 결코 악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만을 말했다.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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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능력에 대한 그(아우구스티누스)의 집착... “전지전능의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제국신화의 핵심이며, ‘궁지에 몰릴 때’ 그것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다.”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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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관한 아우구수티누스의 철저한 ‘단독사역론’은 결코 서방교회에 의해 전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동방측 교회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다.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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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는 아우구스티누스파들은 좋게 보면 반(半) 펠라기우스파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326-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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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위대한 걸작... 『신의 도성』이다. 이 책은 신의 섭리와 인간 역사에 관해 기술한 매우 방대한 저술이다... 인간 문명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하나님 왕국은 교회이고,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에 의해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지상왕국을 하늘의 도시로 대체할 것이다... 역사와 문명에 대한 이같은 해석은 한때 위대했던 로마제국이 산산이 부서지고 멸망해 가는 것을 목격했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위대한 영감과 위로를 제공했다...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 제국의 붕괴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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