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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김흥수ㆍ서정민, 『한국기독교사 탐구』 [7] 한국기독교와 남북분단, 6ㆍ25전쟁 - 김흥수

by [수호천사] 2021.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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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수(목원대학교 교수)

 

1. 개관

 

  • 교회의 국가 재건에 대한 입장은 처음에는 신탁통치 문제에서, 1947년 이후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문제에서 잘 드러났다. (117)

 

2.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

 

  • 교회의 국가 재건에 대한 입장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나 남북협상노선을 따르는 중도파(김구, 김규식 지지 노선), 신탁통치를 지지하면서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따르는 소수의 좌파(김일성 지지 노선),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우파(이승만 지지 노선)로 나누었다. 한국교회 대다수가 추종하던 노선은 우파였다. (118)

 

1) 신탁통치 반대운동

 

  • 194512월 모스크바 3상회의는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협의하여 한국에 대한 미국ㆍ영국ㆍ소련ㆍ중국 4개국의 5년간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 초안을 작성, 이를 4개국 정부의 심의에 회부하기로 했다. (118)

  • 임시정부, 한국민주당,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등 우파 정치세력은 즉각 반발하여 반탁을 결의하였다.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등의 좌파도 처음에는 반탁에 동조했으나 곧 입장을 바꾸어 신탁을 지지하였다... 반탁-찬탁 국면에서 개신교 교회는 명백히 반탁입장을 취했다. (119)

  •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 배은희, 함태영, 이규갑, 이윤영... 19477월 그리스도교연맹... 함태영, 남상철, 김활란, 배은희 등으로 지도부를 구성 (119)

 

2)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론

 

  •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5월까지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미군정은 온화한 중간파세력으로 김규식, 여운형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단체는 김규식이 회장이던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기청)가 유일했다. (119-120)

  • 1947년 들어 간부들의 분열로 기청은 극우적인 청년ㆍ학생단체들과 협력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에 돌입했다. 김구와 김규식 노선을 지지하는 중도파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다. 이 일로 교회 내의 우파와 중도파는 대립했으나 중도파는 지도자들의 암살과 함께 소멸되고 말았다. (120)

  •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성과를 내지 못하자,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를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겼다. 유엔은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120)

 

3) 신탁통치 지지운동

 

  • 1947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북한은 반제반봉건 혁명기(토지개혁, 주요 산업시설의 국유화, 일본인 및 친일파 소유자산의 국유화)로부터 사회주의적 생산과 소유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혁명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121)

  • 기독교민주동맹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받아들였으며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창준 목사가 대표를 맡고 있었다. 그는 민족주의민주전선 공동의장 겸 상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72월에는 기독교민주동맹을 출범시키면서 교계의 좌익세력을 대표했다... 신탁통치 결정 지지... (121)

  • 기독교민주동맹은 대한민국의 수립 이후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194910월 정부의 등록취소 처분을 받아 해산되었다. (122)

  • 해방정국에서 대다수의 교회는 반탁 및 단정노선을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 획득과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했다. (122)

 

3. 교회의 전쟁 참여

 

  •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교회 지도자들은 전쟁을 조국의 통일과 독립과 민주와 자유와 평화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전쟁지원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22)

  • 대한기독교구국회... (122-123)

  • 전쟁지원과 함께 교회는 국군 및 유엔군 점령지에서 선교활동도 전개했다... 한국교회는 전쟁 지원뿐만 아니라 휴전 반대에도 참여하였다... 19517월 부산에서 정전 반대 신도대회가 열렸다. (123)

  • 한국교회의 휴전반대 운동과는 달리 한국전쟁에서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서구교회들은 휴전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세계교회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24)

  • WCC... “한국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 “군사행동의 실제적 진전으로부터 판단해 볼 때 북한정권이 잘 계획된, 공동의 준비된, 전면적인 남한침략을 수행하고 있다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보고서에 근거해서 유엔이 세계질서 유지의 차원에서 이 침략에 맞서서 신속한 결정을 취해줄 것과 회원국들의 경찰행동을 허가해 줄 것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124)

  • 공산권 교회들의 항의... 로마드카(체코 개혁교회 신학자)세계교회협의회가 자신을 (대단히모호한 환경에서) 강대국들의 한 그룹과 동일시하고, 그 그룹의 군사행동을 지지하고, 전 유엔 회원국들로 하여금 그것에 참여하도록 조장했다.”면서 한국 문제가 서구 국가들의 무력간섭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계교회협의회는 경고해야 했는데, 오히려 그것을 지지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125)

 

4. 구호활동

 

  • 19518월 정부가 집계한 피난민(월남 피난민 포함)은 약 380만명, 전시에 가옥과 재산을 잃는 전재민은 대략 402만 명으로 모두 782만여 명에 달했다. 1952년 초까지는 남한 인구의 절반이 구호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126)

  • 미국교회의 기독교세계봉사회는 1950927일 열린 이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긴급 구호를 결의하였다. (126)

  • 외국의 원조단체들이 대거 내한한 시기는 전쟁 시기였다. (128)

  • 전쟁 이후 가장 많은 구호활동을 펼친 단체는 미국 가톨릭복지위원회 산하의 가톨릭구제위원회와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속한 기독교세계봉사회였다. (128)

  • 구호활동은 외국 구호단체가 주도했지만, 여기에 한국교회가 참여함으로써 한국교인들은 구호활동과 사회봉사의 현장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129)

  • 625전쟁은 많은 수의 미망인을 남겼다. 전쟁 미망인들은 30여만 명에 달했으며 그들에게 딸린 아이들은 517,000여 명이나 되었다. (129)

 

5. 연구사

 

  • 625전쟁 이전 남한교회의 국가재건 참여 문제에 대한 연구는 강인철, 한국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 정성한, 한국기독교통일운동사, 허명섭,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재형성 1945-1960” 등이 있다. (130)

  • 625전쟁문제...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1956), 장병욱, 625공산남침과 교회(1983)... (130-131)

  • 한국전쟁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1990년에 들어서면서 종교사회학자들의 연구로 이어졌다... 이 연구들은 전쟁으로 인한 한국사회의 유형과 종교현상 사이의 상관성, 특히 반공적 신앙의 사회적 근원을 밝혀내고 있다. (131)

  • 세계교회들이 625전쟁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연구도 등장했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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